노 대통령은 이날 회동에서 자금조성과 관련된 문제는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측근까지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대북거래와 관련한 부분만은 북한측과의 외교적 신뢰관계를 깰 수 있는 만큼 방지장치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구체적으로 ‘대북거래 부분은 조사와 형사소추에서 제외한다’는 조항을 명시해달라는 제안도 했다.
한편으로 DJ측근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다짐함으로써 한나라당이 특검 수사로 얻고자 하는 기대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특검 수사로 빚어질지 모를 남북관계의 경색을 사전에 막아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의도를 내비친 것이었다.
노 대통령의 이 같은 입장 표명은 거부권행사 시한 전날인 14일까지 여야가 최소한의 남북관계 훼손 방지장치를 만들지 못할 경우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으로도 풀이된다.
문희상(文喜相) 대통령비서실장은 이와 관련해 “한나라당이 성명이라도 내주면 좋겠다”며 최소한의 정치적 선언이라도 해달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물론 이에 대해선 청와대 내부에서조차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정치적 선언만으로는 안전장치를 마련했다고 볼 수 없다는 회의론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문제는 이런 노 대통령의 요구에 대해 한나라당 지도부가 아예 “현재의 특검법안은 이미 민주당의 요구사항을 모두 수렴한 것”이라며 ‘특검법 수정 불가’라는 종전의 입장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박희태(朴熺太) 대표권한대행은 노 대통령의 요청을 “노 대통령이 특별검사를 임명하면서 국익손상이 없도록 각별하게 당부하고, 특별검사의 양심과 인격에 맡기자”는 얘기로 비켜갔다.
박 대행은 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가능성에 대해서는 “거부권 정국으로 가면 예측불허의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이처럼 양측의 견해차가 그대로 드러난 회동이었지만, 청와대는 여야가 재협상에 나서기를 고대하고 있다. 유인태(柳寅泰)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은 “민주당이 현재의 특검법안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새로운 안을 준비하고 있는 만큼 한나라당이 협상에만 응해주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한나라당은 공식적으로 추가협상에 나설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협상이라도 해달라”는 요청까지 거부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만큼 일단 민주당과의 협상은 재개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여야간 협상이 재개되더라도 수정안이 마련되는 식의 돌파구가 열릴 가능성은 여전히 낮다. 특히 박희태 대행체제의 취약성 때문에 사실상 지도력 공백상태인 한나라당의 경우 협상에 들어가더라도 운신의 폭은 매우 좁기 때문이다. 민주당 역시 신주류의 주도로 수정안이 마련되더라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강력하게 요구해온 구주류가 이에 동의할지 미지수다.
따라서 노 대통령으로서는 결국 거부권을 행사하거나 특검법안을 그대로 공포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노 대통령측은 특검법안과 관련해 사회원로 및 시민단체 대표에 이어 야당 지도부와 대화를 가진 데다 민주당 신주류를 통해 수정안 마련작업에도 나선 만큼 거부권 행사라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나름대로의 명분은 축적했다는 입장이어서 이견이 좁혀지지 않을 경우 거부권 행사에 나설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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