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의미에서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시인 홍사용이 위에서 노래한 것처럼 영원으로부터 추방된 인간이 시간 속의 삶이라는 무거운 고통의 짐을 지는 것과 비유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우리보다 더 무겁고 고통스러운 짐을 지고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하더라도, 국민은 그에게 온갖 어려움을 눈물 없이 의연히 대처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믿고 기대한다.
▼정치 승부수로 사용해선 안돼 ▼
최근 들어 노무현 대통령이 자주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통령은 국민에게 왜 자꾸만 ‘눈물의 정치’를 하는 것일까. 그것은 감성이 풍부한 대통령이 대중에게 눈물만큼 호소력 있는 언어가 없다는 점을 고난의 정치 역정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가 명분이 부족한 이라크 파병안이 통과된 직후, 동티모르전쟁 순직자의 유족을 위로하는 자리에서 눈물을 보인 사실이 다시금 국민 사이에 회자(膾炙)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사실 눈물은 인간이 흘리는 생리적 액체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슬픔을 가장 잘 나타내는 침묵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탈무드’는 ‘천국의 문은 기도에 대해선 닫혀 있더라도 눈물에 대해선 열려 있다’고 적고 있다. 전통적으로 눈물은 남성보다는 여성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며 순수한 아름다움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스카 와일드가 “눈물의 소리는 추한 여성의 도피처이지만, 아름다운 여성의 영락(零落)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지나친 눈물은 자신을 추하게 하고 스스로의 존엄성을 잃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지금 노 대통령이 보이는 눈물은 그가 나약한 대통령이란 인상을 국민에게 심어주어 지도자로서의 위엄마저 잃게 할 수도 있다. 더욱이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북핵 문제로 위기에 처한 국가를 통치하는 대통령이 흘리는 눈물은 자칫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 위험마저 내포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노 대통령이 눈물과 함께 보이는 필요 이상의 솔직함과 직설적인 감정은 결국 그 자신에 대한 신비감을 잃게 만들어 국가를 이끌어 가는 통제적 수단에 빈곤을 가져올 수 있다. 우리나라 대중은 과거에 비해 정치적으로 많이 성숙했다고는 하지만 선진국과는 달리 아직도 심한 ‘냄비 증후군’을 앓고 있기 때문에 눈물을 보이는 노 대통령 특유의 정치적 제스처가 아무리 진솔한 것일지라도 쉽게 싫증을 느낄 수 있다. 이 때문에 노 대통령은 대중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위엄있고 냉정한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 눈물을 자주 보이는 것은 그의 다변(多辯)에서 나타난 것처럼 솔직하고 풍부한 감정의 피할 수 없는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직접적인 감정 표현은 미디어를 통한 ‘평검사들과의 대화’에서처럼 대중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들의 힘을 빌려 정치적 승부수를 던질 때 마지막 카드로 사용되는 것 같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정치는 승부수가 아니라 진실”이다.
비록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 ‘노사모’ 모임에서 문성근씨의 연설을 들으며 흘렸던 눈물이 대중의 마음을 흔들어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었지만, 우리는 더 이상 대통령으로서 그가 국민 앞에 ‘낡은 슬픔에 새로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 주기를 원치 않는다. 이제 대통령이 된 그는 인기를 위해 험난한 바다를 건너던 뗏목을 버리고 단단한 육지 위에서 훌륭하게 설계한 집을 짓듯 차갑고 견실하게 국가를 경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눈물 흘리기보다 닦아줘야 ▼
정치지도자는 국민의 원형적인 정서를 완전히 외면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것에 함몰되거나 끌려 다녀서도 안 된다. 대중의 원시적 정서는 국가를 관리하는 정치적 지혜와 결코 일치할 수 없다. 우리는 노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는 감상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마하트마 간디가 말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지도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태동 서강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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