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포석' 人事의 세계]박태준 前총리<中>

  • 입력 2003년 4월 8일 18시 33분


포철 건설 현장에서 직원을 독려하는 박태준 전 총리. 그는 인재를 얻기 위해 먼저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어주고, 대신 혼신을 바쳐 일할 것을 요구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포철 건설 현장에서 직원을 독려하는 박태준 전 총리. 그는 인재를 얻기 위해 먼저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어주고, 대신 혼신을 바쳐 일할 것을 요구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인사관리에 대한 박태준(朴泰俊) 전 총리의 일관된 철학은 “조직의 수준은 ‘꼭대기의 수준’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고경영자의 안목과 식견에 따라 아랫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는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과 육사에서 생도와 교관으로 만났고 이것이 인연이 돼 5·16 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됐다. 그의 말대로라면 인물이 인물을 알아봤다는 얘기가 되는데 대단한 자부심이 없이는 하기 어려운 얘기다. 또한 인재 감별의 출발점이 어디여야 하는가를 명쾌히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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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부 나의 인재감별법<上>

5·16이 일어난 직후 그가 박 대통령에게 “왜 나를 빼고 거사했는가”하고 묻자 박 대통령은 “당신의 역할은 따로 있다”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인재를 얻기 위해서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주는 스타일이다. 대신 선택된 사람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해 줄 것을 요구한다.

“1968년 포철을 세우려고 현장에 내려가보니 인구 5만의 작은 포구마을에 시발택시 두 대밖에 없었어요. 여기에 내로라하는 인재들을 불러오려면 최소한 주택과 교육 등은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모스크바대 총장이 와서 보고는 ‘마르크스 레닌이 꿈꾸던 노동자의 이상향’이라고 평했던 포철 사원 주택단지는 이렇게 지어졌다. 뿐만 아니다. 국내 최고 수준의 학교와 음악당을 지었고 공장마다 목욕탕을 두었다.

지역 차별은 애초에 배제했다. 자신은 경남 양산 출신이었지만 포철의 초대 제철소장과 사장 비서실장이 모두 호남 출신이었다.

학벌은 어떨까. “좋은 학교 나온 사람들이 대체로 일도 잘하더라는 생각은 있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러나 그는 “학교 때문에 다른 중요한 요인들을 무시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드물지만 학벌만 보다가 실패한 경험도 있다.

“명문대 중국어과를 나온 사람이 있기에 베이징(北京) 지사장으로 보냈는데 정작 현장에서 의사소통이 안돼 다른 사람으로 바꾼 적이 있어요.”(웃음)

창업 때부터 93년까지 인사 노무 경영정책 등을 맡았던 여상환(余尙煥·국제경영연구원 원장) 전 포철 부사장은 “포철에서는 1970년대 초반부터 커리어플랜 제도를 도입해 직원들의 진로를 전문가와 관리직 두 가지로 나눴다”고 회고했다. “전문가로 성장할 사람은 성격으로 치면 음성(陰性), 스페셜리스트이고, 관리직으로 성장하는 사람들은 양성(陽性)적인 제너럴리스트 계열이 많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관상은 어떨까. 박 전 총리는 “체구가 크건 작건, 전체적인 풍모에서 균형감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대개 일도 잘하더라”고 말했다. 그의 한 지인은 “TJ(박 전 총리의 애칭)는 똑똑하고 자기 논리가 확실한 사람을 선호했고 늘 주변에 뒀다”고 회고했다.

또 다른 측근은 그가 이미 작고한 박재산이라는 명리학자의 말을 상당히 들은 편이라고 귀띔했다. 박재산은 삼성그룹 고 이병철(李秉喆) 전 회장이 한때 부산에 빌딩까지 사줬다는 인물. 박 전 대통령도 총애했고, 당시 고위 관리들도 그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는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딱 한 사람, 정말 잘못 봤다고 후회하는 사람이 있긴 하다”고 털어놓았다. 한때 ‘TJ 사단’의 핵심이었던 그 사람은 자신이 평생을 걸고 지켜온 포철을 정치권의 외압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서영아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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