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영선생 50주기 추모회…학술강연회-전시회 등 개최

  • 입력 2003년 4월 17일 18시 38분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 선생의 50주기 추모제가 17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선생의 묘소에서 거행되고 있다. -권주훈기자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 선생의 50주기 추모제가 17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선생의 묘소에서 거행되고 있다. -권주훈기자
상하이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하고 광복 후 초대 부통령(1948∼1951)을 지낸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 선생의 50주기 추모회가 17일 오전 서울 강북구 수유동 선생의 묘소에서 엄수됐다.

이철승(李哲承) 추모위원회 위원장은 추념사에서 “선생은 구한말 시절엔 개화 운동, 일제 강점기 땐 항일독립 투쟁, 광복 후에는 부통령직을 수행하며 동시에 반독재 민주투쟁을 전개하는 등 대한민국 정통성의 상징적 존재였다”고 회고했다.

이 위원장은 또 “오늘날 대한민국 건국이념과 정통성이 송두리째 훼손되고 있는 시국에서 선생처럼 조화력과 희생정신에 의한 국가관을 펼치는 정치 지도자를 찾을 길이 없어 침통하다”고 말했다.

어윤대(魚允大) 고려대 총장도 추모사에서 “선생은 후임 2대 부통령인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과 함께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신 진정한 선각자였다”고 말했다.

이날 추모회에는 선생의 장손인 이종문(李鍾文)씨 등 후손을 비롯해 김우전(金祐銓) 광복회장, 최병훈(崔炳勳) 성재기념사업회 이사 등 350여명이 참석했으며 관동대 김기원(金基媛) 교수가 ‘선구자’를 불러 선생의 넋을 기렸다.

추모위원회측은 선생의 50주기를 맞아 18일 오후 2시 서울 서대문독립공원에서 학술 강연회를 연다. 독립기념관에서는 30일까지 선생의 특별 전시회를 마련한다.

이승헌기자 ddr@donga.com

▼이시영선생은 누구▼

17일로 서거 50주기를 맞은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1869∼1953) 선생은 한국 근현대사의 고비 때마다 올곧게 처신했던 ‘지사(志士) 정치인’이었다.

선생은 1910년 일제 통치가 시작되자 만주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투쟁을 시작했다. 선생은 이곳에서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을 주도했다. 3·1운동 이후에는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나서 초대 법무총장 및 국무위원을 맡는 등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광복 이후 선생은 대한독립촉성회 위원장으로 활약하다 1948년 초대 부통령으로 당선됐다.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이은 신흥대학을 설립해 현재 경희대학의 모태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 독재에 거부감을 느끼던 선생은 1951년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부통령을 사임한다. 이때 선생은 당시 정치권을 가리켜 ‘시위소찬’(尸位素餐·능력없이 관직만 차지하고 있는 무리라는 뜻)이라고 일갈했었다. 선생은 1952년 민주국민당 후보로 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53년 6·25전쟁 당시 피란처인 부산에서 서거했다.

하지만 선생에 대한 이후 정부의 평가는 인색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것이 사실상 전부였다.

선생은 국립묘지에도 안장되지 못하고 지금의 수유리 묘지에 묻혔다. 후손들이 이장(移葬)을 호소했지만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후손들은 70년대 말까지 별다른 보조금도 지원받지 못했다. 1976년 사정을 전해들은 이민우(李敏雨) 당시 국회부의장이 내놓은 60만원으로 선생의 수유리 묘지 아래 집을 사들여 묘지와 영정을 관리하고 있다. 선생의 며느리인 서차희(徐且喜·92) 여사가 막내딸과 함께 지금도 그곳을 지키고 있다.

장손 이종문(李鍾文)씨는 “얼마 전 국회를 찾아가 선생의 서거 50주기 행사를 주최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이승헌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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