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임 6개월쯤 된 어느 날 방과 후 선배교사 한 사람이 ‘잠깐 보자’며 부근 야산의 공동묘지로 끌고 갔다. 선배교사와 기다리고 있던 그 지역 경찰관, 깡패 등 5명이 둘러싸고 무릎을 꿇린 뒤 ‘왜 건방지게 전라도 사투리를 계속 쓰느냐. 잘못 했다고 빌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몇 시간 동안 ‘잘못한 게 없다’고 버티자 쥐어박다가 ‘독한 놈’이라며 돌려보내더라. 하도 속이 상해 읍내 술집에 들렀더니 그 일행들이 옆집에 있었다. 결국 함께 통음한 뒤 화해했다.”
전남 영암 출신인 정 보좌관은 이 사건 뒤 17년 동안 거창 땅에 살면서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사투리를 거침없이 썼고, 그의 전라도 사투리는 주민들이 따라할 만큼 명물이 됐다.
그는 민초(民草) 차원의 지역감정이 이처럼 속절없는 것이려니와 스스로 ‘탕평(蕩平) 인사’를 다짐하기 위해 이 일화를 강조하는 듯하다.
그러나 지역감정에서 자유롭다고 자부하는 정 보좌관은 ‘호남 소외론’을 점검하기 위해 3월 말 광주를 방문한 뒤 “바닥민심은 그렇지 않은데 일부 세력이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고 발언했다가 민주당 일각과 지역 언론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았다.
실제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盧武鉉) 후보에게 95%의 몰표를 몰아준 호남주민들로서는 서운함을 느낄 만한 대목도 없지 않은 게 사실이다.
정부 일부 부처의 고위직 인사에서 호남출신이 배제된 상황이나 해양수산부 업무보고 때 전남 광양항은 빼놓고 부산 신항 개발계획만 보고된 점이 그렇다. 특히 대북비밀송금 특검을 둘러싸고 일고 있는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론도 DJ가 여전히 ‘호남의 한(恨)과 자부심’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적어도 ‘호남소외론’의 발단이 된 정부 고위직 인사에 관한 한 실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있는 듯하다. 우선 노 대통령이 직접 ‘호남소외’의 반대 사례로 지적한 외교통상부만 해도 윤영관(尹永寬) 장관은 물론 1급 5명 가운데 두 명이 호남출신이다. 외교 안보라인 전체로 보면 윤 장관 외에 나종일(羅鍾一) 국가안보보좌관, 정세현(丁世鉉) 통일부 장관, 조영길(曺永吉) 국방부 장관 등 핵심라인이 모두 호남출신이다. 개편을 앞둔 국가정보원의 경우는 국·실장급 35명 중 절반가량인 17명이 호남출신이다.
여기에다 법무부가 22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검사장 이상 고위간부 38명 가운데 호남출신은 8명(21%)으로 17명인 영남(44.7%)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비율이다.
따라서 ‘밥그릇 차지하기’ 양상처럼 비쳐지는 호남소외 논란을 두고 일각에서 ‘정치적 의도가 깔린 부풀리기’라거나 “이 나라에 영·호남밖에 없느냐”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민주당 중진의원의 표현처럼 호남이 지난 대선에서 노 후보를 지지한 것은 대안부재의 극한상황에서 감행한 ‘처절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노풍(盧風)’의 시발점이 됐던 지난해 3월 민주당 대선후보 광주 경선에 국민이 갈채를 보냈던 이유는 ‘지역감정을 넘어선 결단’이라는 대의명분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도 호남이 노 후보에게 보냈던 대승적 지지를 보상받는 길은 ‘자리 안배’가 아니라 지역감정의 ‘악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제도 마련 등에 힘을 몰아주는 일일 듯하다. “우리는 괜찮으니 ‘성공한 대통령’이 돼 달라”고 노 대통령을 놓아 주는 것이 호남의 자부심을 살리는 길이라는 생각이다.
이동관 정치부 차장 dklee@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