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보장 요구 완화
북한이 이번에 내놓은 제안 중 가장 전향적인 부분이다.
북한은 1월29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서 미국에 ‘국회(의회)의 법적 절차를 통해 구속력을 지닐 수 있는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라고 촉구하는 등 체제 보장을 위한 미국과의 불가침협정 체결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백남순(白南淳) 북한 외무상은 2월8일 평양을 방문한 나나 수트레스나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에게 “만약 미국이 법률 형식으로 조선의 주권을 존중하고 침범하지 않으며 경제발전에 장애를 조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담보한다면 핵문제는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요구에 대해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등 민주당 일각에선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도록 유도하려면 불가침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책 결정자의 공감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미국은 지금까지 어느 국가하고도 불가침협정을 체결한 적이 없다.
북한은 이 같은 정황을 고려, 현실성이 없는 불가침협정 체결 주장 대신에 어떤 형태로든 법적 구속력이 있는 문서로 불가침을 보장받으면 된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콜린 파월 미 국무부장관이 올 초 협정이 아닌 문서 형태로 북한에 불가침을 보장할 수 있다는 뜻을 밝힌 것도 북한을 고무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로선 북한이 원하는 불가침 보장 방식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직접 보장을 받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다자 형식의 불가침 보장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인지도 분명치 않다”고 말했다.
정부 일각에선 90년대 초 구소련 해체 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 옛 소련 소속 국가들이 핵을 포기할 때 미국 러시아와 주변 국가들이 체제 안전을 보장했던 방안을 북핵 해법의 참고 케이스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불가침협정 체결 요구에 냉담한 반응을 보여 왔기 때문에 북한이 ‘불가침협정 체결’ 요구를 ‘문서 보장’으로 바꾸었다고 해서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核포기 로드맵
북한은 그동안 미국의 적대적 대북정책 포기와 자신들의 핵개발 등 대량살상무기 문제를 한꺼번에 처리하자는 패키지(일괄타결) 방식의 해법을 주장해 왔으나 구체적인 방안을 밝힌 적은 없다.
북한은 그러나 이번 회담에서 ‘미국이 이런 조치를 취하면 우리도 거기에 상응해 이런 조치를 취하겠다’는 식으로 단계적인 해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이 북핵 문제의 해법을 위한 구체적인 시간표까지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순차적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밝힌 것은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북한은 이번에 미국에 대해 어떤 조치를 먼저 취하도록 요구하지 않았다”고 말해 북한이 특정 단계별로 미국과 동시에 행동을 취하는 방안을 제시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순서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북한측은 미국에 대해 중유공급 재개, 경수로사업 이행, 대북제재 완화와 체제 보장 등을 요구하고 이에 맞춰 플루토늄 재처리 등 핵활동 동결, 대량살상무기의 수출 중단, 핵무기의 제조 생산을 비롯한 핵 프로그램 파기, 미국 등의 검증과 사찰 등을 수용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먼저 핵을 포기해야만 과감한 대북지원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이어서 양측이 앞으로 이에 관해 어떻게 타협점을 찾을지 주목된다.
▽추가지원 언급 자제
북한이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미국에 새로운 경제지원을 요구하지 않은 것은 부시 행정부가 북한에 대한 ‘당근’ 제공을 배제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한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북-미 관계가 개선된다고 하더라도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직접적인 경제적 혜택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일본과의 수교 등 북-일 관계 개선을 통해 과거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보상금 형태로 대규모 경제지원을 얻어내고 한국과의 관계진전을 통해 안정적인 경제지원을 얻는 것이 북한엔 더 현실적인 방안이다.
또 북핵 문제가 해결 국면에 접어들면 마지막 단계에서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 문제가 자연스레 논의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이 다자회담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에 미국과의 협상과정에서 미리 경제지원을 요구해서 자신들의 입지를 줄이고, 협상에 난관을 조성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경제 회생을 위한 문제는 제네바 합의 때부터 논의됐던 사안인 만큼 북핵 문제가 해결되고, 북-미 관계가 개선되면 관련국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거론될 장기적인 사안으로 볼 수 있다.
한기흥기자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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