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대북(對北) 비밀송금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엄낙용(嚴洛鎔·사진) 전 산업은행 총재. 최근 송두환(宋斗煥) 특별검사팀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은 엄 전 총재는 28일 일부 기자를 만나 사건의 경과와 현재 심경을 털어놓았다. 그가 밝힌 주요 내용을 ‘1인칭 화법(話法)’으로 소개한다.
▽‘피하고 싶었던 운명’과의 만남=2000년 8월 산은 총재로 부임한 뒤 정철조(鄭哲朝) 부총재에게서 현대상선 4000억원 대출건을 보고받았다. 듣는 순간 이상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다 일단 구체적인 자료를 보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전임 산은 총재인 이근영(李瑾榮) 금융감독위원장을 찾아가 대출 경위를 물어봤고 ‘한광옥(韓光玉) 대통령비서실장의 전화를 받고 (대출)한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결정적으로 심각성을 느낀 것은 김충식(金忠植) 전 현대상선 사장에게서 “우리는 한 푼도 안 썼고 정부가 쓴 돈이니 갚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다. 애원해도 시원찮을 사람이 당당하게 나오는 것을 보고 자금난에 따른 대출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이기호(李起浩)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을 만나 상의했다. 임동원(林東源) 국가정보원장에게도 면담을 요청했더니 김보현(金保鉉) 3차장을 만나라는 연락이 와 만났다. 두 사람은 모두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서해교전의 충격과 인간적 번민=그때부터 ‘이제 내 공직생활도 끝났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의무는 최대한 회수금액을 늘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 이후 ‘깐깐하게’ 업무를 챙겼고 산은 총재에서 중도 하차했다.
지난해 6월 월드컵 열기가 뜨거울 때 서해교전이 일어났다. 우리 젊은이들이 죽어간 것을 보고 너무 괴로웠다. 정말 며칠간 잠도 못 잤다.
나는 과거부터 대북 경제협력에 적극적이었다. 아마 경제관료라면 누구나 북한의 경제발전에 관심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해교전을 보면서 ‘이것은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내가 관여하지 않았고 방식에 동의 못해도 남북관계가 개선됐다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까지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이때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여러 자리에 임명한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에게는 정말 인간적으로 미안하다. 이근영 임동원 김보현씨도 좋은 사이였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됐다.
하지만 다시 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그냥 침묵할 수는 없다. 그래도 고위 관료를 지낸 사람인데 인간적 의리 때문에 이런 일에 입을 다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권순활기자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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