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석 교수=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4월 초 국회 국정연설에서 단기적 경기부양은 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가 1일 MBC 100분 토론에서 경기부양 방침을 사실상 인정했다. 경기부양의 효과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 국회에서 밝힌 사안을 1개월 만에 뒤집는 것은 문제다. 현재의 경제위기는 사스(SARS) 북한핵 이라크전쟁 등 외부변수도 작용했지만 참여정부에 대한 불신도 큰 요인이다. 소비자가 긴가민가하고 있는 마당에 대통령이 말을 바꾸면 경기부양을 실시해도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김 균 교수=노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과정과 인수위원회 작업을 거치며 경기부양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부양하지는 않겠다는 선의가 깔려 있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정치를 하다 보니까 욕심이 생겨 경기부양으로 생각을 바꾼 것 같다. 경기부양이란 심리적 효과가 크니까 대통령이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띄우는 메시지로 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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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문제 및 공기업 개혁▼
▽예종석=정부가 노사문제에서 양보하면 안 된다. 빨간 띠 두른 시위 장면이 CNN에 보도되면 대외신인도가 크게 떨어지고 좀처럼 되살리기 어렵다. 법인세 인하 문제도 대선공약에선 “기업수 기준으로 0.03%인 대기업만 이익을 볼 뿐 중소기업엔 혜택이 없다”며 인하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최근엔 싱가포르 수준인 21%(한국은 평균 27%)로 단계적으로 낮춘다고 했다. ‘나쁜 정책’도 그대로 유지하면 지지층의 지지는 받지만 말을 바꾸면 양쪽 모두의 신뢰를 잃는다.
▽김호기 교수=정부 출범 70일 만에 종합평가를 하기엔 좀 이르다. 큰 정책은 몇 년이 지나야 형성되기 때문이다. 말 바꾸기 문제도 정치는 일관성보다는 상황변화에 따라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게 중요하다는 점에서 봐야 한다. 대통령 말의 구체적 내용이 한국사회에 미칠 영향이 중요한 것이지, 달라진 말 자체를 질책하면 좀 지나치다.
두산중공업사태, 철도노조 파업에서 보면 노동문제에는 대선 공약과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불필요한 오해를 풀기 위해선 대통령이 어떤 구상과 정책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지 로드맵(이정표)을 국민에게 정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예종석=주택공사·토지공사 통합이나 한전 남동발전소 매각이 무산됐다. 개혁을 강조하는 대통령이 이 문제는 밀어붙일 것으로 봤는데 부담이 생기니까 꼬리를 내리는 것 같아서 아쉽다. 두산중공업 문제도 기업에선 법대로 처리하려 했지만 정부가 나서서 다 풀었다. 이는 파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었을 뿐 대통령이 천명한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와는 거리가 있다.
▽김 균=이제 70일밖에 안 됐으니 평가가 이르다는 점에는 생각이 다르다. DJ정부 초기에 경제정책 수립 작업에 참여했는데 첫 100일 정책이 5년간 갔다.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은 재벌정책도 유지하는 등 지난 정권과 큰 단절이 없다. 그러나 공기업 개혁과 관련해선 한전 철도문제를 볼 때 민영화라는 원칙에서 정책적 선회를 한 것 같다. 아직 공식 발표를 안했을 뿐이다. 망(網)산업은 민영화하지 않고 공공의 몫으로 둔다는 논리는 논리적 타당성이 있다. 그렇다면 공식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정작 말을 해야 할 대목에서 말을 안 해서 오해를 사고 있다.
▼경제운용 방식▼
▽김 균=경제 분야의 문제는 총체적인 그림이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아직 배우고 있는 것 같다. 대선공약을 보니까 유럽형의 사민주의를 선호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그러나 MBC 100분 토론에선 “기업하기 좋은 나라, 자본의 국적성보다는 자본 이동을 허용해서 시장의 효율성을 선택한다”고 말했다. 집권한 뒤 경제가 민감하게 돌아가니까 현실을 수용해 친(親)시장 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느꼈다. 자기 생각이 아직 고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제에 관한 한 관료들에게 포획되었다는 외부비판이 나온다.
▽김호기=대통령의 기본 구상 가운데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경제 △합리적인 노사관계는 두 가지가 조화되기 어렵다. 이들이 양립하려면 포괄적이고 수미일관하는 정책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예종석=인수위 시절에 정책 정리가 됐어야 했다. 골프장 룸살롱에서 쓴 돈은 비용처리 하지 않겠다는 국세청 발표가 1개월도 지나지 않아 원점으로 돌아갔다. 행정수도도 임기 시작 1년 내 후보지를 결정한다고 했다가 이후로 미뤘다. 여당 대표는 “공주가 후보지가 돼야 한다”고 말하고 다닌다. 정부 여당이 나서서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는 셈이다. 현재 기업인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정부 정책을 보고 있다.
▼동북아 중심국가▼
▽김 균=동북아 중심국가 건설은 노 대통령이 제시한 국가비전이다. 기성세대는 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지만 ‘월드컵세대’는 달라졌다. 역사상 최초로 한반도를 벗어난 국가비전을 찾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다만 한국이 중심국가가 되려면 동북아 국제정치 공간이 열려야 하고, 한국 정치인이 리더십을 가져야 하고, 경제시장도 통합돼야 한다. 실천적 관점에서 보면 용두사미가 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큰 것 하나를 던져놓는 전형적인 정치인의 레토릭(수사·修辭)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예종석=한국이 동북아 중심국가가 된다는 구호는 이불 속에서 만세 부르기다. 현실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구상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동북아 중심국가 태스크포스가 출범한 직후 부산 인천 광양 3곳을 중심으로 한다는 인수위 결정과는 무관하게 5곳을 중심으로 하겠다고 천명했다. 벌써부터 이렇게 흔들리면 곤란하다.
▽김호기=정부의 구상은 현재 조건은 성공 가능성이 크지 않더라도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한반도도 지리경제학적 이점을 살린다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언어 구사▼
▽예종석=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은 모두 수사(修辭)에 강한 분들이다. 깊은 전문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수사가 강하면 말이 길어지고 실수가 반복된다. 평검사와의 대화에서 “이쯤되면 막 가자는 것이냐”는 표현이나, TV에 나와서 형사피의자(안희정·安熙正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를 “내 동업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런 사례다.
▽김 균=“막 가자는 것이냐”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국어학자들이 가만있어선 안 될 문제였다. 좋은 우리말은 정치지도자들이 가꿔가야 한다.
▼전교조의 반미교육▼
▽예종석=전교조의 반미교육과 관련해서 노 대통령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어야 했다. 우방을 자극해서 국익에 어떤 도움이 되나.
▽김호기=교육 내용은 반미교육도 있지만 반전 평화교육 부분도 있다. 평화라는 가치는 소중한 것이고 이라크전에 대해서도 도덕적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런 교육이 학교 안에서 이뤄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김 균=대통령이 교육부총리에게 전교조의 반미교육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지시한 뒤 문제될 것 없다고 말한 것은 언론에서 결과적으로 반미를 사실상 허용한 것 아니냐고 해설했다. 나는 요즘 희한한 것도 학교에서 가르친다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대통령 발언의 주변환경▼
▽예종석=대통령은 지지층인 운동권에도 잘 보여야 하고 다수 국민에게도 잘 보여야 하는 줄타기를 하다 보니 죽도 밥도 아닌 것이 됐다.
▽김 균=노 대통령이 줄타기하는 인간형은 아닌 것 같다. 그는 과도하게 자기 입장을 밝혀서 점수를 잃는 편이다.
▽김호기=한국사회의 현실이 노무현 정부가 개혁정책을 펴기에 어렵다. 이슈가 나올 때마다 사활을 건 편 가르기가 생긴다. 언론도 논점이 분명히 갈린다. 제대로 된 국정운영을 위해선 중도적 세력이 필요하지만 찾아보기 어렵다. 노 대통령이 지지기반으로 삼는 중산층과 노동자계급을 모두 충족시키기 어려운 정책이 많다. 공기업 민영화도 시민관점에서 보면 개선된 서비스를 떠올리지만 노조는 일자리에 위협을 느낀다.
▽김 균=경제정책은 계층 집단 사이의 갈등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설득력이 수반되면 리더십을 세울 수 있게 된다. 노 대통령은 신중함과 적극적 레토릭 사이의 균형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
▽예종석=대통령의 소탈하고 거침없는 발언, 다양한 토론은 탈(脫)권위주의에는 상당히 일조했다. 난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좌충우돌하는 심정은 짐작할 수 있지만 그럴수록 말을 아꼈으면 좋겠다.
▽김호기=국정이란 담론과 정책의 결합체다. 담론의 미덕은 절제와 설득이다. 그동안 얼마나 절제됐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대통령의 솔직함은 설득력을 갖는다. 정책은 일관성 현실성이 있어야 하는데 정부출범 70일 만에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정리=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이승헌기자 ddr@donga.com
▼좌담 참석자 프로필▼
◆예종석 교수
△1953년생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경제학과
△미국 인디애나대 경영학 박사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김 균 교수
△1954년생
△고려대 경제학과
△미국 듀크대 경제학 박사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김호기 교수
△1960년생
△연세대 사회학과
△독일 빌레펠트대 사회학 박사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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