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이래도 아무 말 없이 쌀 보낼건가

  • 입력 2003년 5월 26일 18시 50분


북한을 신뢰할 만한 대화상대로 착각하는 미망(迷妄)에서 깨어날 때가 된 것 같다. 북한에 40만t의 쌀을 제공하기로 한 남북 합의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북한이 다시 ‘협박카드’를 빼들었다. 엊그제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한미 정상이 합의한 ‘추가적 조치’를 거론하며 “남북관계가 영(零)으로 되고, 남측이 상상할 수 없는 재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폭언을 했다. 지난주 5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추위)에서 있었던 남측 대표단의 해명 요구를 비웃기라도 하듯 재빨리 당시 북측 수석대표의 협박 발언으로 되돌아간 북한의 태도가 참으로 놀랍다.

북한의 협박카드 재활용은 경추위에서 쌀을 얻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해명을 했음을 확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우리도 경추위 합의 이전으로 돌아가는 게 당연해 보인다. 더 이상 구구한 변명은 필요 없다. 정부는 북한의 의중을 잘못 읽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경추위 합의사항의 실천을 재고하는 것도 방법이다.

사흘간 북한을 압박해 문제 발언에 대해 유감성 해명을 받아내는 성과를 거뒀다며 경추위 결과를 자랑했던 정부 당국자들은 철저히 반성해야 한다. 어설픈 해명을 수용했다가 이런 망신스러운 결과를 초래한 잘못을 통감해야 할 것이다.

북한은 추가적 조치와 관련해 “남측은 궁색한 변명으로 진실을 가리려 하지 말고 잘못을 시인하고 민족 앞에 사죄해야 한다”는 궤변까지 늘어놓았다. 어쩌다가 쌀을 퍼주고도 죄인취급을 받는 신세가 되었는가.

이번 경추위의 교훈은 우리가 북한에 끌려간 정도가 아니라 북한의 위장전술에 철저히 속았다는 것이다. 정부가 북한에 속고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쌀을 보내는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변하지 않은 북한을 변했다고 옹호하는 실수는 더 이상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에 쌀을 보낸다면 쌀 한톨 한톨이 협박에 굴복했다는 증거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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