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朴泰俊) 전 회장의 그림자를 지우는 동시에 ‘정명식-조말수 체제’의 내분(內紛)을 잠재울 재목을 찾고 있던 YS에게 김 의원의 ‘트레이드마크’인 ‘조직 장악력’이 강하게 어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항상 웃는 얼굴, 부드러운 말씨, 특유의 간접화법, 서강대 교수와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을 지낸 경력. 어디를 봐도 ‘장악’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옛 경제기획원(EPB)이나 재무부에서 일한 관료들은 ‘조직 장악의 명수’로 김 의원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EPB 출신의 한 경제부처 국장은 “그의 과감한 인사를 통한 조직 장악력은 재무부 장관 시절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부총리 취임 이후 보여준 고위직 인사에서 전율을 느낄 정도로 실감했다”고 회고했다.
86년 1월 김만제 부총리가 부임할 당시 EPB 안에는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이 있었다. 대외개방 업무를 총괄하던 조직으로, 상공부 차관을 지낸 B씨가 단장(차관급)을 맡고 있었다. B단장은 손꼽히는 통상전문가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고 사공일(司空壹)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과도 각별한 사이였다. 하지만 김 부총리와는 오래 전부터 ‘코드’가 맞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고위층의 신임을 바탕으로 B단장은 ‘껄끄러운’ 김 부총리가 부임한 후에도 기획단의 조직과 기능을 대폭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었다.
EPB 간부들이 ‘실세인 김 부총리도 B단장만큼은 어쩔 수 없구나’라는 생각을 굳힐 무렵인 그해 3월, 김 부총리는 기획단 해체를 전격 발표한다. 대외경제조정실을 신설해 기획단 업무를 흡수하고 실장은 차관급이 아닌 1급으로 격을 낮춘다는 것. 다시 말해 차관급인 B단장은 EPB를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사공 수석이 김 부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했지만 발표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김 부총리가 전 대통령과 독대(獨對)하는 자리에서 기획단 개편방안보고서에 대한 재가를 받은 뒤였기 때문이다.
“너무 심하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김 의원의 설명은 이렇다.
“장관이 하는 일은 행정과 정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행정은 업무가 반복적이고 처리 관행이 잘 정립돼 있어 차관에게 맡겨두면 됩니다. 인사도 관행에 따르면 되고, 1년에 한번 정도 순환인사를 함으로써 조직에 활력을 넣어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정책은 장관의 철학과 비전, 능력에 따라 접근방법이나 결과가 크게 달라집니다. 철저하게 신임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는 미국의 대한(對韓) 통상압력이 가장 중요한 경제현안으로 떠오를 때인데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겨둘 수는 없잖아요.”
김 의원은 대외경제조정실을 신설한 직후 KDI 출신의 구본영(具本英)씨를 제3협력관에 임명, 대미(對美) 통상업무를 총괄하게 했다. 정통관료가 아닌 연구원 출신을 요직 국장에 임명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파격에 속한다.
구씨는 나중에 주미공사를 거쳐 교통부 차관, 과학기술처 차관,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과기처 장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를 지내는 등 공직에서 승승장구한다.(계속)
▼김만제 前부총리는 ▼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으로 37세 때인 71년 KDI 초대 원장으로 발탁됐다. 11년간 원장으로 재임하면서 KDI 전성기를 이끌었다. 한미은행 초대 행장을 거쳐 83년 10월부터 2년여 간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 86년 1월부터 87년 5월까지 부총리를 지내면서 ‘3저 호황(好況)’에 힘입어 만년 적자이던 경상수지를 흑자로 전환시켰다. YS 정부에서는 포항제철 회장을 역임한 뒤 2000년 5월 대구 수성갑에서 당선돼 국회의원(한나라당)으로 활동하고 있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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