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김 부총리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출신의 구본영(具本英)씨를 국장급으로 발탁한 것 외에는 눈에 띌 만한 인사를 하지 않았다.
전임 부총리가 임명한 문희갑(文熹甲) 차관, 이진설(李鎭卨) 예산실장, 진념(陳稔) 차관보, 강봉균(康奉均) 경제기획국장, 김인호(金仁浩) 물가정책국장 등 실세 5인방은 김 부총리가 이임하는 날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김 의원은 재무부 장관 때도 핵심 요직에는 전임자들이 등용한 인물을 그대로 썼다.
이형구(李炯九) 차관보는 장관 임기가 끝날 때까지 바꾸지 않았고 강현욱(姜賢旭) 이재국장은 본인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1년 반 만에 임창열(林昌烈) 이재국장으로 교체했다.
장관이 되면 인사를 통해 자기 색깔을 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도 전임자의 인사를 그대로 물려받은 이유를 김 의원은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로 철저하게 능력을 검증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바꿀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둘째로 인사가 조금 부적절했다 치더라도 용인(用人)을 잘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김 부총리가 취임한 86년 초반 한국 경제는 ‘3저(低) 현상’으로 해외 부문에서 유례없는 호기를 맞았으나 국내 부문은 불경기와 높은 실업률 때문에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당시 경제정책 기조를 놓고 기획원 간부들은 김 부총리와 시각 차이를 보였다. 김 부총리는 통화 확대정책이 필요하다고 본 반면 기획원 간부들은 80년대 초반 어렵게 쌓아 올린 물가안정이라는 ‘공든 탑’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긴축정책을 고수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김 부총리는 박영철(朴英哲) 고려대 교수를 초청, 기획원 간부들을 대상으로 통화 확대정책이 왜 바람직한지를 주제로 특강을 하게 한다. 이를 계기로 기획원의 분위기는 차츰 확대정책기조로 바뀌었다.
설득과 교육도 한 축이었지만 ‘김만제식 용인술’의 가장 큰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확실한 ‘보상’이었다.
김 의원은 71년 KDI를 설립할 때 수석연구원들의 봉급을 대학교수의 3배 수준인 12만8000∼20만1400원으로 정했다. 또 당시에는 기업들도 별로 도입하지 않았던 성과급제를 앞서 도입했다. 성과급제 때문에 수석연구원 이상급 가운데 원장의 연봉이 가장 적은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는 재무부 장관이 되고나서도 은행원 봉급 인상을 우선적으로 추진했다.
“70년대 말 급여 삭감으로 은행원들이 사기가 떨어진 점이 이철희 장영자 어음사기사건 등 대형 금융사고가 터진 원인 중 하나”라는 설명에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인상안을 두말없이 재가했다.
대통령 보고내용에는 빠져 있던 인상률은 김 장관의 공식발표에서 처음 공개된다. 대리급 이상 전 은행원의 봉급이 70∼80% 올랐고 일부는 하루아침에 봉급이 2배로 인상됐다.
94년 그가 포항제철 회장으로 부임했을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포철 임직원들의 연봉을 1년 전과 비교하면 임원은 70∼84%, 직원은 50%가량 올랐다. 이 때문에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았지만 김 의원의 생각은 달랐다.
“보상은 돈 이전에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능력과 성과에 따라 보상하는 것은 능력에 따라 사람을 등용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