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영식/ ‘킬링 필드’와 北核

  • 입력 2003년 6월 20일 18시 01분


10차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과 동남아국가연합(ASEAN)+3(한중일) 외무장관 회의가 열렸던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남서쪽으로 15km를 가면 ‘킬링필드(Killing Field·죽음의 들판)’가 있다.

같은 제목의 미국 영화로도 유명한 이곳은 1970년대 후반 캄보디아 공산화 과정에서 크메르 루주 정권이 대학살을 저지르면서 ‘킬링필드’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당시의 공포분위기는 없다. 오히려 학살과정에서 생긴 집단 무덤과 기념관만이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의 집단 무덤 129기에서는 8985구의 시신이 발굴됐다. 그러나 이는 1975년 4월부터 1977년 1월 사이에 벌어진 대학살과 기근, 질병 등으로 목숨을 잃은 200만명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캄보디아는 1980년 프놈펜 시내에 있는 툴 슐랭 감옥을 역사박물관으로 바꾸었다. 이곳에서만 1만499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박물관은 과거의 비극적인 사실(史實)을 기억해 더 이상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지를 상징하고 있다.

정부군과 공산군 간의 내전이 있기 전에는 우리나라보다 잘살았다는 캄보디아. 세계 최대의 석조건물이자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유명한 앙코르와트도 이 나라에 있다. 그러나 지금은 1인당 국민소득(GNI)이 300달러도 안 된다. 게다가 내전의 상흔은 아직도 치유되지 못했다. 신체의 일부분을 잃은 사람을 돕자는 구호가 적힌 간판을 거리 곳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지뢰제거차량이 거리를 가로질러 급히 출동하기도 한다.

말로만 듣던 비극의 현장을 둘러보면서 착잡한 느낌이 들었다. 북한 핵문제로 인해 나날이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 때문이었다.

프놈펜에 모인 각국의 외무장관들은 회의 때마다 북핵 문제를 거론하며 한반도 정세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미국과 일본은 북한이 다자회담에 응하지 않을 경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핵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 북한의 영변 핵시설 공격계획까지 세웠던 미국의 북핵 개발 저지 의지는 확고했다.

그러나 벼랑끝 전술을 거듭해온 북한은 국제사회의 대북(對北) 압박 움직임에 불만을 나타내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킬링필드를 보면서 한반도에서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점을 절감했다. 북한도 더 늦기 전에 핵이나 전쟁이 얼마나 위험한 선택인지를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프놈펜에서>

김영식 정치부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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