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使대신 정부 나와라” 정치투쟁 변질

  • 입력 2003년 6월 22일 18시 43분


《24일 부산 인천 대구지하철 노조원들이 1인승무제 폐지 등을 주장하며 연대파업을 벌이는 것을 시작으로 올 여름 노동계의 '하투(夏鬪)'가 줄을 잇는다. 이에 따라 노사관계는 물론 정국(政局)까지 급속히 검색될 전망이다. 정부가 출범 초기 '친 노동자 성향'을 보이면서 노동계의 기대심리를 한껏 높여놓은 데다 일부 부처에서 노정(勞政)합의를 번복, 분규를 재연시켜 정부가 노사관계 불안을 조장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줄 잇는 파업=25일 오후 민주노총 10만여 노조원들이 정부의 강경 노동정책 회귀 움직임에 맞서 4시간짜리 경고성 파업을 벌인다. 전국철도노조는 28일 파업에 들어간다.

한국노총은 30일 20여만명이 참여한 가운데 총파업을 강행한다. 금융노조 등 대부분은 이날 하루만 참가하지만 임금 및 단체협상이 현안인 사업장은 파업을 계속키로 했다.

다음달 2일에는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민주노총 금속연맹 및 금속노조, 9일부터는 대학병원 등을 중심으로 한 보건의료노조가 순차적으로 파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정치투쟁이 주류=올 여름 노동계 파업의 큰 특징은 순수 임단협보다는 주5일 근무제 관철, 비정규직 차별 철폐, 근골격계 질환 대책 마련, 경제자유구역법 폐기 등 제도 개선 요구에서 비롯된 ‘정치투쟁’이 주요 이슈라는 점이다.

노조가 사용자가 아니라 정부를 대화 파트너로 요구하고 있어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자연히 불법파업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가장 큰 쟁점은 근로시간 단축. 노동계는 기존 근로조건을 하나도 다치지 않고 근로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사용자측은 합리적인 선에서 휴가 및 휴일제도를 조정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어깨 무릎 등 신체에 부담을 주는 장시간 노동으로 생기는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대책을 세우라는 노동계의 요구도 정부에서 입법을 추진하고 있는 내용이어서 사용자로서는 막막하기만 하다.

▽정부가 화 키운다?=두산중공업 철도 화물연대에 이어 조흥은행까지 노동계가 사실상 압승을 거둠으로써 사용자들은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됐다. 한국노총도 22일 조흥은행 사태 해결에 대해 “판정승”이라고 자평했다.

노동부는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한 것이지 노조의 손을 들어준 것은 아니다”라고 하지만 적어도 현 정부 출범 초기의 ‘친 노조 성향’이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급박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서둘러 ‘노정 합의’를 하고 나중에 번복해 분규가 재연되는 사례도 잦다. 조흥은행 파업과 관련, 한국노총은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시절 당시 노동특보였던 박태주 청와대 노동개혁 태스크포스팀장을 통해 “정부의 일괄매각 방침은 철회돼야 한다”고 약속했다가 말을 바꾼 것이 파업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건설교통부가 ‘노조와 협의해 철도구조개혁을 추진한다’고 해놓고 관련 법안 입법을 강행한 것도 분규를 키웠다고 노동계는 주장한다.

▽노동계 전망=올 하투의 위력은 ‘메가톤급’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라는 게 정부는 물론 노동계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노동계가 ‘개악’이라고 주장하는 근로시간 단축 관련 법안의 6월 임시국회 통과가 사실상 무산돼 주5일 근무제 시행 여부가 각 사업장의 판단에 맡겨진 데다 한국노총 총파업의 가장 큰 이슈였던 조흥은행 파업이 해결돼 파업 동력(動力)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어느 사업장도 소홀히 다룰 수야 없지만 현재로선 파업 후유증이 큰 철도와 주5일 근무제를 놓고 노사간 ‘대리전’을 벌이고 있는 현대자동차를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

▼왜 '夏鬪' 인가▼

노동단체들이 시기집중 투쟁을 벌이는 까닭에 대해 민주노총 손낙구(孫洛龜) 교육선전실장은 한 마디로 “교섭력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지금처럼 개별 사업장 단위로 교섭이 이뤄지는 체제에서는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노조가 밀릴 수밖에 없어 뭉쳐야 사측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산발적인 파업보다 사회적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도 이유. 노동부 노민기(盧民基) 노사정책국장은 “노동계가 자신들의 어려운 사정을 여론에 호소해 이목을 집중시키면 정부도, 정치권도 도외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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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

▼‘勞’기 등등▼

현대자동차 노조(위원장 이헌구·李憲九·42)는 단일 사업장으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조합원 3만8000명)인 데다 금속산업연맹의 핵심이어서 이번 하투(夏鬪)의 ‘태풍의 눈’으로 간주되고 있다.

현대차 노조는 올해 국내 노동계의 임금 및 단체협약 투쟁을 선도하고 노동계의 공동요구안을 관철시키기 위한 전위대로 나설 것임을 공언해왔다. 이는 올해 현대차 분규가 여느 해보다 강도가 높아질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어서 또다시 울산발(發) ‘분규 회오리’가 거세게 불어 닥칠 전망이다.

현대차 노조는 24일 쟁의행위 돌입 여부를 묻는 조합원 찬반투표를 실시하는 등 민주노총의 7월2일 총파업에 합류하기 위한 쟁의수순을 밟고 있다.

노조는 20일 열린 중앙쟁의대책위원회에서 24일 찬반투표를 시작으로 △25일=4시간 부분파업, 민주노총 울산본부 임단협 투쟁 전진대회 개최 △26일=2시간 부분파업 △27일=산별(産別) 전환을 위한 조합원 찬반투표 실시 등의 쟁의일정을 확정했다.

현대차 노조의 쟁의는 겉으론 올해 임단협 협상의 부진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주 40시간 근무제와 비정규직 처우개선 등 노동계의 공동 요구사항을 관철하기 위한 대리전의 양상을 띠고 있다.

현대차 노조는 올 단체협약 요구안에 △주 40시간 근무 명문화 △비정규직 조직화와 차별 철폐 △해외공장 설립 등 자본 이동시 노사공동결정 등 3대 핵심요구안을 확정해 민주노총 금속산업연맹 산하 금속노조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에 대해 회사측은 “핵심 요구사항은 모두 현행법의 범위를 벗어나거나 인사경영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으로 단위 사업장 노사간에 협의할 사안이 아니다”는 입장이다.

노조는 또 임금 12만4989원(기본급 대비 11.01%), 상여금 100% 인상, 성과급 200% 지급 등을 요구하고 있으나 회사측은 “경영성과를 고려하지 않은 과다한 요구”라며 역시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

현대차 노사는 4월18일부터 16차례 임단협 협상을 가졌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했으며 이에 노조는 16일 교섭결렬을 선언했다.

울산=정재락기자 raks@donga.com

▼‘使’기 저하▼

현대자동차 노조원들이 5월2일 울산공장 본관 앞 광장에서 올해 임금 및 단체협상을 위한 출정식을 갖고 있다.-사진제공 현대자동차 노조

“정부는 ‘노조가 약자’라는 온정주의에서 벗어나 법치주의 원칙에 따라 공정한 법집행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본격적인 하투(夏鬪)를 앞두고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경영계는 노사문제에 대한 정부의 태도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잇단 노사분규의 해결과정에서 노사관계의 균형추가 일방적으로 노조측에 기울어졌다는 경영계의 ‘피해의식’을 반영한 것.

조흥은행 노조의 파업과 관련해서도 경총은 “원만히 해결된 것은 다행이지만 교섭 또는 쟁의행위의 대상이 되지 않는 민영화 반대가 명분이었다는 점에서 명백한 불법파업인데도 노조의 요구안이 대부분 받아들여진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13일과 19일 두 차례 열린 주요 기업 인사노무담당 임원간담회에서는 기업들의 이런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기업체 임원들은 노무현(盧武鉉) 정부 출범 이후 정부가 보인 대처방식을 ‘감상적 온정주의’ ‘법과 원칙의 훼손’이라고 규정하며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이 자리에서 경총의 이동응(李東應) 상무는 “기업현실을 외면하거나 교섭대상이 될 수 없는 경영상의 결정 등에 대한 노조의 과도한 요구로 교섭 자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개별 기업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총파업 강행 등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 A기업 임원은 “최근의 산업현장은 1987년 6·29선언 이후의 혼란 상황과 비슷하다”며 “노사관계 불안은 정부가 주장하는 제도상의 문제점 때문이 아니라 노조의 집단이기주의적 태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정부가 노사문제의 핵심사안에 대해 조정역할을 못하고 있는데 대해서도 경영계는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다.

김동진(金東晉) 현대자동차 사장 등 국내 5개 완성차업체 사장단이 18일 권기홍(權奇洪) 노동부 장관과 가진 간담회에서도 이런 불만이 터져 나왔다. 사장단은 “산업계의 핵심쟁점인 주 40시간 근무제가 사업장별 임단협에서 개별적으로 다뤄질 경우 쉽게 접점을 찾기 힘들어 막대한 비용과 파장이 예상된다”며 “국회에 계류된 법안이 빨리 입법화될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달라”고 주문했다.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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