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줄파업도 '유연하게 대처' 한다면

  • 입력 2003년 6월 24일 18시 28분


노무현 대통령이 지방노동관서 근로감독관들과 가진 오찬간담회에서 한 발언은 원칙론으로는 맞다. “집단행동에 무조건 대화나 타협만 하거나, 원칙대로 공권력을 투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은 노사 양측을 모두 배려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조직화된 폭력이라면 원칙을 갖고 뿌리 뽑아야 하지만 일시적인 폭력이라면 유연하게 대처하는 게 맞다”는 말도 취지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이란 시점과 장소에 따라 전혀 다른 함의를 가질 수 있다. 근로감독관들에게 노사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집행을 당부하려는 의도는 좋다. 하지만 조흥은행 불법파업이 막 끝난 데 이어 부산 대구 인천 지하철노조가 파업에 들어갔고 각종 파업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시점에 대통령의 ‘유연한 대처’ 발언은 노동계를 고무시키기에 충분하다. 노 대통령은 심지어 조흥은행에 대한 공권력 투입 경고가 협상카드였음을 실토하기까지 했다.

김진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불법파업이라도 대화와 타협은 필요하다”고 말한 것도 일반론으로는 맞지만 현 시점에서 경제부처 수장이 공식적으로 할 말은 아니었다. 이러니까 정부가 국정운영의 중심을 경제에 둔다고 해도 기업은 정부를 믿기는커녕 공장 해외이전 같은 최후 통첩성 호소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경쟁적으로 이어지는 줄파업은 국가경제의 미래를 위협하는 최대 복병으로 등장했다. 기업은 노동계의 강경투쟁 일변도와 정부의 애매한 노동정책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갈수록 의욕이 떨어져가는 상황이다. 정부가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는 법과 원칙이 실종됐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장관은 자신의 입을 떠난 말이 어떻게 해석될 것인지에 대해 전략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 맞는 말이라도 해야 할 때가 있고 삼가야 할 때가 있다. 지금 정부가 해야 할 말은 경제를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는 줄파업에 대한 자제 촉구와, 경기회복을 위해 기업투자를 고취하는 격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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