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국민의 정부]<30>3부 ⑤현대家 왕자의 난(上)

  • 입력 2003년 7월 30일 17시 21분


2000년 5월 3부자 퇴진발표를 앞세워 정몽헌측이 벌인 ‘2차 왕자의 난’의 목적은 정몽구로부터 현대차를 뺏으려는 것이었으나 이는 결국 정몽구측의 반발과 정부의 개입으로 무산됐다. 2001년 3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장례식에서 입관식을 지켜보고 있는 현대가 삼형제. 왼쪽부터 정몽구 현대차 회장,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정몽준 의원.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0년 5월 3부자 퇴진발표를 앞세워 정몽헌측이 벌인 ‘2차 왕자의 난’의 목적은 정몽구로부터 현대차를 뺏으려는 것이었으나 이는 결국 정몽구측의 반발과 정부의 개입으로 무산됐다. 2001년 3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장례식에서 입관식을 지켜보고 있는 현대가 삼형제. 왼쪽부터 정몽구 현대차 회장,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정몽준 의원. -동아일보 자료사진
“아무도 방에 들여보내지 마시오.”

2000년 5월 31일 오전 10시경. 서울 종로구 청운동 북악산 기슭에 맞닿아 있는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창업주 자택. 정몽헌(鄭夢憲·MH) 현대그룹 회장과 김윤규(金潤圭) 현대건설 사장은 대문을 들어서며 집안일을 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그룹을 살리기 위해서는 (3부자 퇴진을) 발표해야 합니다.” “대북 사업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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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재촉하는 듯한 얘기를 들은 듯, 못 들은 듯 정주영 명예회장은 헛기침만 던졌다.

방에서 물러나온 이들은 따로 청운동을 찾은 김재수(金在洙) 현대그룹 구조조정위원장과 함께 10분 거리에 있는 계동 현대사옥으로 급히 자리를 옮겼다.

그날 오후 2시15분.

김 구조조정위원장은 계동 현대사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가 오늘 정 명예회장님을 직접 뵈었다”고 운을 뗀 후 ‘3부자의 동반 퇴진’을 전격 발표했다.

정 명예회장과 현대가(家)의 사실상 장자인 정몽구(鄭夢九·MK) 현대자동차 회장, 5남인 정 현대그룹 회장이 함께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현대 3부자 동반 퇴진’ 발표는 이렇게 시작됐다.

현대그룹측은 지금까지 3부자 퇴진 발표가 정 명예회장의 ‘자발적 결정’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이익치(李益治) 현대증권 회장 등 MH 핵심측근들의 전략이 작용했다는 게 관련자들의 증언이다.

당시 상황을 조금만 앞당겨 보자.

나흘 앞선 5월 27일.

현대의 주 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은 심각한 자금난을 겪고 있는 현대측과의 실무협상을 중단한 채 “이달 말까지 신뢰할 수 있는 자구방안을 마련해 오라”고 현대측을 압박했다.

정부도 긴급 경제장관회의에서 현대에 고강도 구조조정을 촉구하기에 이른다.

이용근(李容根) 금융감독위원장은 이날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정부는 시장의 입장에서 현대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며 “현대는 시장이 신뢰할 만한 조치를 내놔야 할 것”이라고 몰아세웠다.

그러나 현대는 이때까지 정 명예회장의 퇴진은 물론 이 현대증권 회장과 이창식(李昌植) 현대투신 사장 등에 대한 채권단의 문책 요구에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버티고 있었다. 심지어 우량 계열사 매각을 통한 자금(유동성) 확보 요구도 외면했다.

금감위의 한 고위간부는 “당시 현대가 채권단의 요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은 무언가 ‘믿을 언덕’을 찾았기 때문인 것만은 분명했다”며 “당시 청와대의 핵심인사들과 매우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은 이번 대북 송금 특검 결과를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고 말했다.

MH는 이처럼 채권단의 전방위 압박을 받자 일단 5월 27일 김 현대건설 사장 등과 함께 일본으로 출국했다.

MH측의 반대편이었던 MK의 핵심측근 A씨의 증언.

“MH와 이 현대증권 회장 등이 3부자 동반 퇴진 이라는 카드를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MK 진영에서는) 솔직히 몰랐다. 허를 찔린 셈이었다.”

3부자 퇴진 발표에 대해 당시 채권단의 한 간부는 “머리를 깎고 오라고 말했는데, 완전히 빡빡 밀고 온 셈”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3부자 퇴진 시나리오의 목적은 실제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현대 문제를 담당했던 금감원 간부 L씨는 “나중에 보니 3부자 동반 퇴진을 기획한 MH측에서 진짜로 겨냥한 것은 현대차의 경영권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외환은행 고위간부도 “MH측 실세들은 대북 사업을 위해서 현대그룹 내에서 가장 현금 동원력이 뛰어난 현대차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앞세워 정·관계를 설득하고 다닌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현대차의 수뇌부들은 대북 사업 참여에 적극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현대차의 한 중역은 “밑빠진 독처럼 돈을 쏟아 부어야 하는 대북 사업에 연루되면 나중에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얘기가 당시 현대차 고위간부회의에서 거의 매일 나왔다”고 전했다.

아무튼 MK측은 곧바로 퇴진을 거부함으로써 동반 퇴진 발표를 사실상 승인한 ‘왕회장’에게 항명(抗命)했다.

3부자가 함께 물러나더라도 정 현대그룹 회장은 대북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현대아산의 경영에 참여할 수 있게 돼 있어, 결국 MK가 빠진 현대차를 포함한 현대계열사 전체를 수중에 넣게 된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3부자 퇴진 발표가 있기 얼마 전 정 명예회장의 계열사 지분 이동이 ‘비밀작전’처럼 전개됐었다. 정 명예회장이 보유하고 있는 현대건설(11.1%) 현대중공업(4.1%) 현대상선(2.7%) 지분의 대부분을 MH가 대주주인 현대건설 현대상선과 MH 개인에게 매각한 것이다.

정 명예회장은 이 지분 매각 대금으로 현대차 지분 6.8%를 매입해 일거에 현대차 최대주주가 됐다. 현대그룹의 후계구도를 완전히 뒤흔드는 결과를 만든 셈이다.

현대 계열사 P사장은 “자동차 부문은 장자인 MK, 건설과 전자는 MH, 중공업은 MJ(정몽준·鄭夢準 의원) 등 암묵적으로 영역이 정해져 있었으나 ‘왕회장’의 자동차 지분 인수로 이 구도가 뒤죽박죽이 됐다”며 “이 과정을 거쳐 MH가 중공업에다 자동차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던 셈이다”고 기억했다.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였던 정 의원도 이 같은 흐름을 알아채고 강력히 반발했다.

정 의원은 이즈음 열렸던 현대가(家) 가족회의에서 “그룹을 망치는 이익치를 빨리 내쫓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결국 이 현대증권 회장은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된다.

이 같은 두 사람의 관계는 정 의원의 대선 출마시 해외에 체류 중이던 이 전 현대증권 회장이 정 의원을 비난하는 비난성 기자회견을 자청함으로써 악연(惡緣)으로 이어진다.

아무튼 정 명예회장의 지분 이동으로 영역이 넓어진 MH 진영의 기세는 계속 이어졌다.

2000년 6월 28일 계동 현대사옥.

김 구조조정위원장이 3부자 퇴진 발표에 이어 또 다른 ‘깜짝 발표’로 정부와 시장을 흔들어 놓았다.

“현대의 35개 계열사 가운데 당초 분리될 예정이었던 현대차 관련 6개사 등 모두 10개사를 남기고, 대신 현대건설 현대중공업 등 나머지 25개사를 분리하는 방안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신청하겠다.”

이른바 ‘역(逆)계열분리’ 선언이었다.

통상적인 계열분리는 모기업이 남고 계열사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지만, 반대로 모기업이 떨어져 나가겠다는 역발상이었다.

계열분리 방안을 내놓겠다고 대내외적으로 약속한 현대측의 이 같은 상식 밖의 발상은 ‘왕회장’의 현대차 지분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현대차를 떼어 내는 계열분리를 실시하면 법에서 정한 계열분리 요건상 정 명예회장의 현대차 지분을 3%로 낮춰야 하지만 현대차를 그룹에 남겨두고 현대건설 등을 떼어 내면 지분을 낮출 필요가 없기 때문에 ‘꾀’를 냈던 것이다.

6월 30일 오후 3시. 현대는 공정위에 이 같은 변칙적인 계열분리 방안을 공식 제출했다.

전윤철(田允喆) 공정거래위원장은 “현대측의 계열분리안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물론 법적 요건도 갖추지 못했다. 계열분리를 하려면 정 명예회장이 보유한 현대차 지분 9%를 3%까지 낮추라”고 현대측의 신청을 일축했다.

한국 최대의 재벌가인 현대그룹의 형제간 경영권 다툼이었던 ‘왕자의 난’이 MK 쪽의 판정승으로 결론이 나는 순간이었다.

▼가신의 난▼

“삼성은 시스템이, 현대는 가신(家臣)이 이끈다.”

재계에서 두 그룹의 특징을 말할 때 흔히 인용되는 말이다.

‘왕자의 난’으로 불렸던 현대의 경영권 쟁탈전이 일명 ‘가신의 난’으로도 불렸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두 차례에 걸친 현대가의 경영권 다툼도 따지고 보면 정몽구(鄭夢九·MK), 정몽헌(鄭夢憲·MH) 두 회장 진영에 속하는 가신들의 치열한 두뇌전이었다.

선공에 나섰던 MH 진영은 이익치(李益治) 현대증권 회장, 김윤규(金潤圭) 현대건설 사장, 김재수(金在洙) 구조조정위원장 등 이른바 ‘MH 3인방’이 대표주자였다.

이익치 회장과 김윤규 사장은 69년 현대건설 입사 동기로 정주영 명예회장의 비서출신이라는 게 공통점.

이들은 ‘왕회장’이 일선에서 업무를 챙길 당시에는 ‘왕회장 직계’로 분류됐다. 이후 정 명예회장이 장자인 MK 대신 MH에게 후계구도의 무게를 실어 주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MH의 후견 세력이 됐던 것.

2000년 3월 14일 MK측이 현대증권 회장이던 이익치를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전격 전보시킨 것이 ‘1차 왕자의 난’의 발단이 됐다.

MK측에서 “3부자 퇴진과 역 계열분리 추진 등은 모두 이익치의 머리에서 나온 작품들”이라고 공언할 정도로 이 전 회장은 아이디어가 풍부한 인물. 김윤규 사장은 왕회장의 마지막 승부수라 할 수 있는 대북사업 전담사인 현대아산 사장직을 지금까지 맡고 있다.

이들 MH 3인방에 맞서 3부자 퇴진 거부와 현대차 사수 등을 MK에게 건의하고 방어 전략을 제공했던 MK측 3인방은 유인균(柳仁均) INI스틸 회장, 이계안(李啓安) 현대카드 회장, 정순원(鄭淳元) 현대·기아차 기획총괄본부장이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정몽구 회장이 나온 경복고 출신으로 양 진영이 치열한 전투를 벌일 때 ‘경복 수비대’라는 별명을 들었다.

유 회장은 정몽구 회장의 고교 동창으로 리더십을 갖춘 재계의 마당발. MK의 의중을 가장 잘 파악하는 측근이기도 하다. 이계안 회장은 MK진영의 제갈량으로 통할 만큼 시야가 넓고 전술 구사에 능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정순원 본부장은 현대경제연구원 출신답게 그룹 내의 대표적인 기획통으로 꼽힌다.

▼특별취재팀▼

▽팀장=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승헌기자

▽경제부=반병희 차장

홍찬선 김동원 박중현 김두영기자

▽사회부=하종대 이명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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