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상처’ 서로 어루만져야 ▼
광복 58주년이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 55주년이기도 한 올해 8·15까지도, 우리는 한마음으로 어우러진 축제를 열지 못하고 친미와 반미를 외치는 두 무리로 갈라져 시위를 했다. 사회주의가 현실에서 판정패해 냉전구도가 종식된 지 15년이 지났고, 세습 독재체제 북한이 세계의 문제아로 고립되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왜 이념대립의 망령이 되살아나는가. 역사는 역류하는가.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의 기저에는 조국 분단이라는 비극이 깔려 있고 그 비극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외세에 의해 강요된 조국의 정치적 이념적 분단과 제주 4·3사건, 남북 단독정부 수립, 여수 순천 10·19사건, 6·25와 군사독재, 그리고 광주로 이어지는 그 비극의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이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 수난을 당했다. 그 상처들이 어두운 그늘에서 곪아 들어가다가, 비극의 물리적 흔적들이 사라진 지금까지도 후유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분단의 직접적 원인은 미국과 소련의 이념적 정치적 대립에 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러시아를 나무라고 미국을 배척한다고 우리 민족에게 득될 일이 있는가. 또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비극의 최대 원인은 우리의 ‘힘없음’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힘이 부족해 국권을 일본에 빼앗겼으며 우리 힘으로 광복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미군과 소련군이 나라를 분할 점령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1948년 북한에 소련의 비호를 받는 단독정부가 미리 선포되지 않고 유엔 감시 아래 한반도 전역에서 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면 분단의 고착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련의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지지하지만 않았어도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 얼마나 가공할 체제였는가는 누구보다도 러시아인들이 가장 잘 안다. 미국이 자신의 세계안보 전략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대한민국을 방어망에 포함시켜 한반도 남쪽만이라도 공산 독재체제에 휩쓸리는 것을 막아준 데 대해 감사하게 여겨야 할 일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개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 전쟁의 와중에 포화로 피해를 보거나 세상이 반공 친공으로 거듭 뒤집어지는 상황에서 정치적 고통을 겪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화를 입힌 쪽은 우군이건 적군이건 상관없이 철천지원수로 각인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온 집안이 뿌리 뽑히는 비극이 빚어지고, 마치 화를 당한 것 자체가 죄의 증명인 듯 억울함을 호소도 못하는 억압적 삶이 수십 년이나 계속될 때 그 상처는 아물기보다는 독이 되어 다음 세대로 전수될 수 있다.
우리 속에 깊이 패어 있는 이념갈등의 골을 메우려면 먼저 ‘운이 좋아’ 개인적 비극을 모면한 사람들이 비극을 당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어루만지는 일에 나서야 한다. 그들의 반체제적 과격함을 비난하기에 앞서 말이다. ‘반공치하’에서 수난을 당했던 사람들도, 이제 와서 새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문제 삼으며 북한의 세습체제까지 비호하려 한다면 이는 또 다른 비극을 낳는 길일 뿐 자신도 민족도 위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냉정함이 필요하다.
▼세계 속 고립 자초할 필요 없어 ▼
남북한 대치의 비극에 종지부를 찍고 북한에 사는 우리 겨레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일은 시급하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경제 안보 모든 면에서 세계 속의 대한민국으로서 강한 입지를 구축했을 때의 일이지, 세계로부터 고립을 자초하며 할 일은 아니다. 북한 스스로가 미국에 체제를 보장해 줄 것을 최대 목표로 고집하고 있는 상황인데, 정작 남한에선 미군만 철수하면 남북이 평화통일을 이룩하고 빈사 상태의 북한 경제까지 살려내 민족 번영을 구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과연 우리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가. 지금 우리에게는 반미가 애국이고 혁신에 대한 보장인 듯한 환상에 젖어 있을 여유가 없다.
이인호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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