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개헌은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의 토대에서 만들어진 평화헌법의 정신을 부정하는 민감한 사안. 집단적 자위권의 인정, 천황의 국가원수화, 자위대의 군대화 등 재무장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어느 정치인도 섣불리 입에 담지 못했다.
파문이 커지자 고이즈미 총리는 다음날 “개헌 얘기를 먼저 꺼낸 쪽은 간사장”이라며 “임기 중에는 개헌을 추진할 생각이 없다”고 둘러댔다. 그러면서도 “군대 보유를 금지한 헌법 9조는 좀 이상하지 않으냐”며 현행 헌법의 문제점을 은근히 부각시켰다.
해명을 액면대로 받아들이면 개헌을 한다는 건지, 안한다는 건지 헷갈린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 개헌은 현 정권의 공약으로 굳어졌다. 한 외교소식통은 “속내를 슬쩍 흘렸다가 문제가 되면 부정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기정사실로 만들어 나가는 ‘고이즈미식 화법’이 또 한번 작용했다”고 말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5월 국회에서 “자위대는 실질적으로 군대”라고 답변했다가 문제가 되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라고 물러섰지만 나중에 다른 자리에서 또 “자위대는 군대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발언→번복→재발언의 소동을 거치면서 ‘자위대=군대’는 일본 국민의 상식이 됐다. ‘스스로를 지키는 게 임무’인 자위대(自衛隊)가 이라크에 파견돼도, 공격용 무기를 도입해도 이를 문제 삼는 지적은 나오지 않는다.
일본의 개헌론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 온 한국과 중국 정부도 이번에는 6자회담에 정신이 팔린 때문인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유감 성명이 나올 법도 하지만 이마저도 없다.
이런 정황을 종합해 보면 일본 우익은 6자회담을 틈타 반세기 이상 금기(禁忌)의 영역이던 ‘개헌’ 고지를 향한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다.
6자회담을 앞두고 일본 정부는 한미일 공조를 강조해 왔다. 동맹국임을 내세워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에 대한 협조도 부탁했다. 그러면서 슬쩍 개헌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머리를 맞대는 바로 그 순간 우방의 뒤통수를 쳤다는 비난이 나올 법한 상황이다.
우방의 대통령이 자국을 방문하는 동안 전시 대비용 유사법제를 참의원에서 통과시킨 ‘결례’를 범한 지 아직 3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박원재 도쿄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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