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반병희/예산심의 올해도 '흥정' 하나

  • 입력 2003년 9월 3일 18시 22분


정기국회가 개원 초부터 어수선하다.

여당은 신당 문제로, 야당은 세대교체론으로 여름 한철을 보내더니 개원을 하자마자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놓고 한바탕 난리를 쳤다.

이러다간 16대 국회 마지막 정기국회 100일간의 회기를 정쟁(政爭)으로 지새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국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학자들은 입법과 국가예산의 심의, 확정 권한을 꼽는다. 그중에서도 예산 심의권은 나라의 살림살이를 심사하고 집행을 승인한다는 점에서 의회 고유의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영국의 근대 의회가 국민의 혈세를 정부가 제대로 사용하는지를 견제 감시하기 위한 ‘파수꾼’역에서 출발한 것이나, 많은 국가에서 예산안이 국회에서 부결될 경우 곧바로 내각 해산으로 이어지는 것도 예산심의를 그만큼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가.

서민들은 시장에 가서 조그만 물건을 살 때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물건값을 따진다. 그런데 우리 의원들은 117조5000억원(2004년 일반회계)이나 되는 국민의 혈세 지출에 얼마나 조심스럽게 접근하는지 의문이다.

답을 듣기 위해 의원들의 육성 고백을 들어보자.

한 재선 의원은 기자에게 “예산결산위원회(예결위)에서 계수조정을 할 때 한눈파는 사이에 수천억원짜리 사업이 넘어가곤 한다. 한번은 화장실을 잠깐 다녀왔더니 내 지역구 관련 사업이 한 건도 반영되지 않았더라. 정회시간에 ‘다시 심의하지 않으면 당신들 지역구 사업도 깔아뭉개겠다’고 아우성을 친 끝에 원하는 만큼 예산을 따냈다”고 털어놨다.

계수조정에 필요한 합리적 지침이나 객관적 기준 없이 ‘올해 호남지역에 편성된 총액은 얼마이니까 영남지역은 얼마로 늘려주자’는 식이라는 설명이다.

예결위의 한 초선 의원도 “한나라당 의원들이 새만금사업과 전주공항 예산에 대해 ‘불필요한 것 아니냐’고 한 번씩 시비를 걸 때마다 영남권 지역구의 예산이 하나씩 추가된다”고 고백했다.

“예산심의는 없고 오직 지역과 당파적 이해에 얽매여 벌거벗은 ‘흥정’만이 지배한다”는 게 이들의 솔직한 ‘고발’이다.

문제는 올해도 이런 굴절된 관행이 개선될 조짐이 안 보인다는 점이다. 일부 예결위 위원들은 벌써부터 동료의원들의 로비 때문에 괴롭다고 하소연이다. 내년 총선을 의식해 ‘필수과목’(반드시 챙겨야 할 지역구 사업) ‘선택과목’(당 차원에서 중시하는 사업)으로 나누어 소매를 붙드는 동료의원들의 민원이 산더미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나마 수년 전부터 논의돼 왔던 예결위 계수조정작업의 공개도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미뤄지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다 보니 학계에서는 미국처럼 예산안을 아예 법안으로 통과시키도록 해 의원들의 개입 소지를 줄이거나 예결위를 대신하는 상설기구를 의회 내에 설치해야 한다는 등 다양한 주장이 나온 지 오래다. 심지어 의회 소속의 독립기구를 두어 예산 결산 심사 기능을 맡기자는 안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학자들의 주장대로 제도의 정비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의원들의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정치가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선도하고 이를 위해 국가예산이 알차게 사용되려면 의원들은 당장 이번 회기부터라도 지역과 당파적 이해관계를 넘어 예산심의에 임해야 하지 않을까. 국가예산은 한 나라를 움직이는 혈맥이다.

반병희 정치부 차장 bbhe42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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