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조1775억원 규모의 2003년 추경예산안 심의가 한창 진행되던 올해 7월 중순.
국회 본관 내 한 회의실에서 열린 예결위 비공식 회의장으로 한나라당 A의원의 보좌관이 황급히 새 안경을 들고 뛰어 들어갔다. 예산안을 놓고 ‘이 사업을 넣자, 저 사업을 넣자’며 A의원과 실랑이를 벌이던 민주당 B의원이 ‘왜 합의를 번복하느냐’며 A의원의 얼굴을 치는 바람에 안경이 떨어져 알이 깨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A의원은 “이 정도는 비일비재한 일”이라며 “2000년에도 자민련의 한 의원으로부터 멱살잡이를 당한 일이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국가의 1년 살림살이를 심의 확정하는 예결위. 그 무대 뒤편에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13일 국회 예결위원장실에서 만난 이윤수(李允洙) 위원장은 처음에는 “동료 의원들 욕하는 것 같고, 나도 잘한 것도 없는데…”라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결국 국회의원 들이 공모해 나눠먹기로 진행돼온 예산심의의 ‘벌거벗은 현실’을 2시간여 동안 털어놓았다.
“계수조정 소위에 들어가면 지역구 사업, 도별 민원, 동료 의원 부탁, 당 지시 사업 등을 적어와 서로 따내려고 난리죠. 물론 자기 지역구 사업이 ‘1순위’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국가 차원에서 필요한 사업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입니다.”
올 여름 추경안 심의 과정에서는 몇몇 의원들의 극성스러운 ‘지역구 챙기기’ 때문에 심의가 지연되기도 했다. 특히 지하철 방화 참사가 난 대구의 경우는 정부가 충분히 보상금을 지원했는데도 한 지역구 의원이 400억원을 더 반영시키자고 버텨 결국 200억원으로 타협을 이루기도 했다는 것. 이 위원장은 “당시 계수조정 과정을 공개해 기자들이 빤히 보고 있는데도 의사 진행을 방해하며 지역구 사업을 노골적으로 챙기더라”고 개탄했다.
100조원이 훨씬 넘는 본 예산을 놓고 벌어지는 각 당 예결위원들의 ‘밀고 당기기’와 ‘막후 흥정’은 더욱 가관이다.
이 위원장은 “경상도에 이만큼 줬으니 전라도에도 같은 규모만큼 나눠 줘야 할 것 아니냐는 해괴한 ‘지역 균형’ 논리가 판을 쳐온 게 정치판의 현주소”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2002년도 예산안 심의 때의 일.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각각 계수조정 소위 위원 6명 중 4명을 영남과 호남권 의원으로 배정했다. 이 바람에 호남 쪽 숙원사업인 새만금사업과 전주신공항 사업예산을 영남지역의 각종 민원성 사업예산과 양 지역 의원들이 서로 바터형식으로 흥정해 나눠먹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 위원장은 “정부안 중 보통 4000억∼5000억원의 삭감 대상 예산을 찾으면 이 중 절반은 계수조정 소위 위원 등의 지역구 사업예산에 반영되고, 나머지 절반만 형식적으로 삭감하는 게 관례다. 서로 싸우다 막판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의 담합을 하게 된다”고 했다.
국회는 117조5000억원의 2004년도 예산안 심의를 앞두고 있다. 이 위원장은 “벌써 예결위원 중에 ‘계수조정 소위에 안 넣어주면 가만히 안 있겠다’고 반(半) 협박조로 나오는 사람이 있다. 또 각종 민원과 청탁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고 하소연을 했다.
“이 서랍 안을 보세요. 전부 동료 의원이나 자치단체장의 민원서류입니다. 나도 옛날에는 ‘이것 안 들어주면 너하고 말도 안한다’고 협박하고, 끝내 안 먹히면 욕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위원장 되니까 청탁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겠더군요. 사실 나도 과거에는 내 지역이나 우리 당 역점 사업 챙기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고, 내가 욕먹더라도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부 의원들의 경우는 지역구 몇 십억 챙기는 데는 눈에 핏발을 세우면서도 몇 푼 안 되는 장애인이나 사회단체 사업 예산은 팍팍 잘라 내기 일쑤지요.”
이 위원장은 마지막으로 “특정지역이나 지역구사업에 대한 예산 편성을 요구하며 심의를 지연하고 떼를 쓰는 위원들이 있으면 명단을 언론에 다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의원 자신들의 ‘발상의 전환’이 없이는 어떤 제도를 도입해도 결국 백년하청(百年河淸)일 수밖에 없다”고 씁쓸히 말했다.
정용관기자 yongari@donga.com
▼이윤수 위원장은…▼
6대 국회 때 당시 김대중(金大中) 의원의 경호비서로 정치에 입문한 3선 의원(65세). 네 번째 도전 끝에 14대 때 첫 금배지를 달았다. 주로 국회 건설교통위에서 활동했으며 여러 차례 국정감사 스타에 뽑히기도 했다. 범(汎)동교동계로 분류되나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입바른 소리’를 자주해 DJ 정권 내내 비주류에 머물렀다. 올 7월 초 당내 주류측 일부 의원의 반대로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결국 16대 국회 마지막 예결위원장을 맡았다. 지난 대선 때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며 민주당을 탈당했다가 복당했다. 현재 민주당 사수파의 핵심 멤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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