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실장은 통역 내용 일부를 바로잡은 뒤 기자회견을 계속 진행시켰다. 자구 하나에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린 만큼 회의결과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참석자들은 “정책형 지휘관답게 꼼꼼하고 적확한 지적이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는 보스형, 뜨는 정책형.’ 1990년대 이후 군 지휘부의 분야별 부침을 표현하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군 지휘관이라고 하면 전선(戰線)에서 수만의 대군을 호령하는 보스 기질의 용장을 떠올리기 마련. 실제로 1992년 김영삼(金泳三) 정부 출범 이전까지는 ‘정책적 사고’보다는 ‘야전 경험’이 우세한 보스형 지휘관이 요직을 독식했다. 하나회 인맥이 그 대표적인 유형이다. 이론에 밝은 정책형 장교들은 군 수뇌가 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하나회 숙정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소외되던 전략 정책통이 국방 분야의 요직에 포진하게 된 것. 특히 91년 만들어진 국방부 정책실은 ‘국방 두뇌’의 요람 역할을 했다.
국방부 정책실은 각종 국방정책, 외국과의 안보협력 문제, 남북군사관계 및 군비통제 문제를 다루는 국방부의 핵심 부서.
현역 중장이 임명되는 정책실장 자리를 거친 장교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 뒤 출세가도를 달려 국방장관을 지내거나 대장으로 진급하는 영예를 누렸다.
김동진(金東鎭·육사 17기) 조성태(趙成台·육사 20기) 전 장관이 정책실장 직을 발판으로 군 최고위직에 오른 케이스다. 국방대 교수 출신인 박용옥(朴庸玉·육사 21기) 전 차관은 군의 대표적인 대미 정책통으로 중대장 이상 야전지휘관을 한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직위진급을 세 차례나 하며 중장으로 정책실장까지 올랐다.
대미 관계와 안보정책이 최대의 국방 현안으로 부각된 노무현(盧武鉉) 정부에서도 정책통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1980년부터 무려 14년간 한국국방연구원(KIDA)에서 안보정책 및 군비통제 분야의 책임연구원을 지낸 차영구 실장은 박 전 차관과 함께 대미 정책 전문가로 통한다. 그도 야전 경험이 거의 없지만, 두 차례의 직위진급을 했다.
김희상(金熙相) 대통령비서실 국방보좌관은 정책실장을 지내지는 않았지만 현역 시절인 1988년 3월 대통령국방비서관으로 발탁돼 군 구조 개편 계획인 ‘8·18계획’을 추진하면서 주목을 받은 정책통이다. 육사 교관 시절인 1977년에 저술한 ‘중동전쟁’은 지금까지도 군내에서 꾸준히 읽히는 책이다. 그는 그 뒤에도 틈틈이 안보 관련 저술을 내 현직에 있는 동안 가장 많은 책을 쓴 장군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군내에서 전략통의 자리로는 국방부의 미주정책과장, 합참의 군사전략과장 및 대미 군사협력관계를 주로 다루는 군사협력과장 등이 꼽히는데 김동신(金東信) 전 국방장관, 유보선(兪普善) 국방차관, 신일순(申日淳·육군 대장)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등이 이 코스를 거쳤다.
그러나 정책통에 대한 군내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우선 이들 대부분이 육군이다 보니 타군의 소외감이 팽배하다. 해군의 한 관계자는 “해공군 출신 정책통과 전략통은 눈을 씻고 찾아봐야 할 만큼 드물다”며 “이런 현상이 ‘육방부’라는 말을 낳을 만큼 기형적인 군 구조를 확대 재생산하는 결과를 빚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실전에선 ‘머리’보다 ‘행동’으로 부하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솔할 수 있는 보스형 지휘관이 더 필요하다는 주장도 아직은 만만치 않다. 특히 국방부 및 합참의 전략정책 부서에서 근무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주로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장교들은 ‘정책통 우대’ 현상에 강한 불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정책통의 부상은 세계적 추세라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컴퓨터와 정보기술로 가득 찬 첨단 전력이 주축인 현대전에서는 ‘용장’보다 ‘지장’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첨단 정보전으로 상징되는 미래전에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전략 정책통의 중요성은 앞으로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상호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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