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포석 人事의 세계]권력기관-국정원<1>해외요원

  • 입력 2003년 9월 16일 18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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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와 그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는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를 부훈으로 내세웠다. DJ정부는 안기부를 국가정보원으로 개칭하면서 원훈을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꿨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중앙정보부와 그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는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를 부훈으로 내세웠다. DJ정부는 안기부를 국가정보원으로 개칭하면서 원훈을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꿨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북한에 비해 수교국이 많다는 것이 남한의 체제 우위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지던 1970년대. 북한 단독수교국이던 아프리카 A국에서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이하 중정) 요원 C씨가 A국 정부로 하여금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단절케 하고 남한과 수교토록 하는 ‘개가’를 올린 일이 있었다.

당시 A국은 내전이 한창이었다. C씨는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 현장에 잠입, 사살된 반군의 주검 사이를 돌며 그들의 총기를 수거한 뒤 ‘made in DPRK’(북한제)라는 표시가 찍힌 소총을 그들의 손에 쥐어놓았다. 나중에 이를 발견한 A국 정부는 “북한이 반군을 지원하고 있다”고 단정하고 북한에 대해 즉각 단교 조치를 취했다.

전직 중정 고위관계자가 소개한 ‘해외공작’ 사례다. 이처럼 국정원의 해외파트 공작원이 수행한 일은 이밖에도 셀 수 없이 많다. 중동지역 국가에 수출된 북한 미사일의 설계도를 통째로 빼내온 일,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함께 이란의 미국대사관 직원 구출작전에 참가한 일 등.

그러나 국익을 위해 목숨을 걸고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해외공작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충분하지 못하다. 이 관계자는 “승진 기회와 자리가 제한되다보니 해외공작원들이 중도에 좌절하거나 다른 길을 찾게 된다. 유능한 요원이던 C씨의 경우 해외파트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국내파트로 전직했다. C씨는 그 뒤 권력에 줄을 대고 출세 지향적으로 가더니 결국 비리문제로 중정을 떠났다”고 말했다.

해외공작원들의 ‘좌절’은 국내정치 위주로 운영돼 온 국정원의 불행한 과거와 무관치 않다. 국내정치에 관여하는 자리, 상관의 입에 맞는 보고서를 잘 만드는 사람들이 각광받고 음지에서 위험부담을 감수하며 일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서자 취급을 받는 현실에서 해외파트, 그중에서도 공작원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해외파트 출신의 한 전직 국정원 관계자는 “해외공작원은 말하자면 스파이다. 정보기관에서는 정보를 빼오고 공작을 수행하는 스파이가 꽃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일반적으로 국내파트가 중시되는 데다 해외파트 내에서도 스파이보다는 책상물림 분석관들이 우대받는 풍조가 있다. 사정이 이런데 해외공작원들의 사기가 오르겠느냐”고 되물었다.

해외공작원들의 사기 저하는 국정원을 ‘문약(文弱) 체질’로 만들고, 나아가 국익에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사실 어느 나라 정보기관이든 해외공작 업무는 선호 대상이 아니다. 이는 미 CIA도 예외가 아니다. 이종찬(李鍾贊) 전 국정원장은 “10여년 전 CIA 출신인 제임스 릴리 전 주한 미국대사로부터 ‘CIA가 문약해져서 걱정이다. 요원들이 해외공작 같은 위험한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며 “해외공작원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얘기였는데, 우리의 경우도 사실상 같은 상황이었다”고 토로했다.

이 전 원장의 계속되는 설명. “70년대 초 아랍권에 주재하던 한 공작원이 주재국 인맥과 연계해 국내에 이슬람 교사원을 ‘유치’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아랍권에서 한국의 이미지가 크게 개선됐고, 덕분에 우리 기업의 중동 건설시장 진출이 급증했다. 그 요원은 80년대에 퇴직했는데, 지금 끼니 걱정을 하는 형편이어서 과거 동료들이 돈을 모아 월 50만원씩 보태주고 있다. 이게 해외공작원들이 맞게 되는 현실이다.”

해외공작원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이 같은 견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해외파트에는 주요 거점에 2, 3급 자리가 상당수이고 1급이 보임되는 해외공관 공사 자리도 3∼5개나 되는 등 국내파트보다 고위직이 많아 해외공작원들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는 것.

이에 대해 전직 해외공작원은 이렇게 반박했다. “얼마 전 TV를 보니 한 외국의 정보기관 관계자가 나와 ‘정보원은 국익을 위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을 하더라. 그게 해외공작원의 운명이다. 평생 그런 위험 부담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외감은 단순히 자리 몇 개로 보상되는 것이 아니다.”

이 전 원장이 제시하는 한 가지 대안. “해외공작원은 정년을 두면 안 된다. 그들이 평생 구축한 해외정보 네트워크를 활용한다는 차원에서도 해외공작원만큼은 정년에 관계없이 실력 위주로 써야 한다. 그것이 그들에게도, 나라에도 모두 좋은 일이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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