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 30일 민주당 송석찬(宋錫贊) 의원은 자민련(17석)을 원내교섭단체(20석 이상)로 만들기 위해 동료 의원 2명과 함께 탈당하며 지구당 당원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그는 편지에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는 진솔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기에 어떤 비난에도 절대 좌절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여론은 '헌정사상 초유의 의원 꿔주기' '정치사상 최초의 임대(賃貸) 정당 탄생'이라며 '정치의 코미디화'를 개탄했다.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송 의원은 "나 같은 비극적 정치인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길 바란다"며 2시간 반 동안 '연어'의 뒤늦은 회한(悔恨)을 털어놓았다.
"2000년 7월24일 국회 운영위에서 민주당과 자민련이 원내교섭단체 구성 요건을 현행 20석에서 10석으로 낮추는 국회법 개정안을 단독 처리되자, 한나라당의 거센 반발로 국회가 파행했다. 그래서 당시 의원총회에서 난 '자민련에 양자(養子)로라도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너무 황당한 얘기라고 생각했는지 아무도 귀 기울려 듣지 않았다.
물론 나도 처음엔 '원내교섭단체 안 만들어주면 국정 운영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자민련의 주장을 잘못된 억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정치'란 네 글자에 압도돼 갔다.
같은 해 12월29일 대전시지부 송년회를 하면서 '나는 떠나니, 여러분이 당을 지켜달라'고 말했다. 그 땐 이미 다음날인 30일 '거사(擧事)'가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당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지난 총선에서 나를 지지해준 유권자와 당원들이 느낄 허탈감과 배신감을 생각하니, 밤새 한숨도 잘 수 없었다. 베개가 눈물로 범벅이 됐다.
'자민련 입당'에 대한 여론의 비난은 혹독했다. 참여연대는 '정치인의 길을 포기한 자살 행위'라는 논평을 내놓았고, 한 사이버정치증권 사이트의 내 주가는 평균 이상이던 3만1800여원에서 꼴찌에서 두 번째인 6380원까지 떨어졌다.
지역구 경조사에 가면 '너 같은 놈이 국회의원이냐' '누구 맘대로 탈당했느냐'며 항의하는 유권자를 쩔쩔매매 달래야 했다.
당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격려'가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탈당한 지 보름쯤 지난 뒤 DJ는 직접 전화를 걸어 '송 동지. 지금은 국민의 지탄을 받지만, 국민의 정부가 성공하면 역사가 송 동지를 평가할 겁니다'고 말했다.
자민련에 있는 동안 난 '시집살이 하는 며느리' 심정으로 살았다. '며느리가 친정(민주당) 생각만 한다'는 소리를 안 듣기 위해, 당 지도부 결정에 잘 따랐고 공식 회의에도 꼬박꼬박 참석했다. 그러나 자민련의 의총이나 당무회의에선 '민주당 때문에 지난 총선에서 졌다' '공동 정권이라지만, 민주당이 해 주는 게 뭐 있느냐'는 등의 민주당 성토가 늘 쏟아졌다. 시누이(자민련 의원)나 시동생(자민련 원외위원장)의 잔소리를 듣는 심정이었다. 너무 속상했다.
양당 정책위의장이 합의한 개혁 입법안들조차 자민련 회의에선 비판 받기 일쑤였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던 내가 대표적 보수 정당인 자민련에 오면서 '어차피 공동 정권이니까, 그런 이념적 차이는 문제 안 될 것'이라던 기대는 환상이었음을 깨달았다.
같은 해 2월 하순경 DJ의 최측근인 민주당 권노갑(權魯甲) 전 최고위원을 만나 '이런 식의 DJP 공조는 지속되기 어렵다. 합당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김종필(金鍾泌) 자민련 명예총재를 통합신당의 총재로 앉히고, DJ는 명예총재로 물러앉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권 전 최고위원은 'DJ의 용퇴는 나도 거론조차 할 수 없다'고 거부하며, '송 의원이 총대를 메라'고 권유했다. 3월 초 나는 DJ의 총재직 사퇴를 건의하는 공개편지를 썼다. 나도 DJ 면전에서 그런 건의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민련과 JP는 'DJ 다음은 JP'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DJ와 민주당이 이에 전혀 호응하지 않자, 공조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9월3일 임동원(林東源) 통일부장관 해임 건의안 가결도 그런 근본적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해임안 가결 직후 나는 곧바로 친정으로 가는 보따리를 쌌다. '현실정치는 다 이런 것이다'며 자위하면서….
그러나 8개월여의 '연어 생활'을 겪은 뒤, '현실정치'란 네 글자로 포장했던 내 행동이 국민의 뜻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정치인이 이념과 정책이 다른 정당과 '동거'를 하는 것은 그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한국 정치에서 '연어의 비극'은 나 하나로 족하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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