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안인해/盧대통령, 리더가 되라

  • 입력 2003년 9월 18일 18시 47분


초등학교 시절부터 방송반에서 활동했던 터라 TV 시사토론 프로그램의 사회를 맡아 달라는 한 방송사의 제의에 응한 지 벌써 다섯 달이 지났다. 주로 여야 국회의원들의 찬반 토론을 통해 대립각을 세워 쟁점을 드러내는 형식이다. 사회자로서 속내를 감추고 엄정 중립을 지키려고 애쓰지만, 토론자들끼리 격렬하게 대립하는 장면이 연출될수록 시청률이 더 높아진다니, 혹시나 국론분열을 부추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뒤따른다.

▼派兵 여론떠보기 국론만 분열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지 7개월이 지나도록 정치권이 계속 표류하는 가운데 산적한 국정과제들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불만이 팽배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막대한 태풍 피해로 수많은 이재민이 신음하고 있고,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의 여파로 농민들이 시름에 잠겨 있으며, 미국의 이라크 파병 요청으로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어느 문제 하나라도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국가적 위기를 불러올 수 있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그 현안들 가운데 파병 문제는 이념논쟁까지 내포하고 있어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킬 기세다. 미국이 독자적 작전수행 능력을 갖춘 상당한 규모의 경보병 부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이미 전국적으로 찬반 양론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비전투병을 파견했던 지난봄의 결정 때보다 훨씬 민감한 사항들을 담았기에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노 대통령은 마치 파병이 결정된 듯이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며 여론 수렴을 통해 신중하게 결정하겠다고 다짐했다. 얼핏 듣기엔 민주적인 자세로 보여 수긍하는 쪽으로 기우는 국민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그러한 태도는 오히려 국론분열을 부채질할 수 있다. 외교안보 문제는 국가 이익을 가장 앞세워야 하는 고도의 전문적 정책결정을 요구한다. 국가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외교안보 문제의 경우 지도자가 여론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여론을 선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지도자는 여론을 이끌어야(lead) 한다. 여론에 이끌려서는(led) 안 된다. 여론에 끌려 다니면 이미 ‘리더(lead-er)’가 아니라 ‘레더(led-er)’일 뿐이다.

이라크전쟁 발발 직전에 서방세계의 지도자들이 내린 정책결정을 보면 리더가 취해야 할 행동양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거센 반전론에도 불구하고 개전을 결심해 승전으로 이끌었다. 물론 미군 사상자가 늘어남에 따른 여론의 역풍으로 내년 대선에서 재선을 장담할 수 없게 됐지만 리더로서 소신을 바꾸지는 않았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미국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정책결정으로 전쟁의 승리에 기여했다. 반면 전쟁에 반대한다는 소신을 처음부터 당당히 밝힌 리더들도 있었다.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와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유엔의 역할을 내세우며 미국의 일방주의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자국의 반전 여론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리더는 일단 정책결정을 내리고 나면 비전을 제시하면서 여론을 형성하고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이에 따른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국민의 인식 수렴이 필요한 절차일 수는 있지만 올바르게 국민이 인식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최고 지도자가 뒤로 물러나 있으면서 참모들을 통해 여론을 떠보려 한다면 당장은 편하고 여론의 화살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국론은 갈라지고 통합의 길은 점점 멀어지게 된다.

▼공론 주되하되 異見 반영해야▼

국익을 위한 불가피한 정책결정의 의지를 보이고 반대자들을 앞장서서 설득해 나가는 진정한 리더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내리누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여기서 중국인들이 즐겨 쓰는 구동존이(求同存異)라는 말을 되새기게 된다. 그것은 서로 동일함을 추구하지만 또한 상이함을 인정함으로써 공존의 방식을 모색하는 중국인의 지혜다. 대통령이 중심을 바로잡고 주도적으로 공론을 일으키되 다른 의견들도 충분히 반영되도록 배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안인해 객원논설위원 고려대 국제대학원·국제정치학 yhahn@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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