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적용된 혐의는 러시아 외교부 간부를 매수해 기밀을 빼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응조치로 우리 정부도 서울 주재 러시아 외교관 한 명을 추방해, 양국간에는 한동안 외교 갈등이 벌어졌다.
당시 한국 정부는 A씨의 ‘스파이 행위’에 관한 러시아의 주장을 부인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A씨가 실제로는 국가정보원 소속 해외공작요원이었기 때문이다. 정보기관 요원이 A씨처럼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하는 것을 ‘공식 위장(Official Cover)’이라고 한다. 이 같은 공식 위장은 어느 나라나 다 하는 일로, 상대국은 알면서도 이를 눈감아 준다. 당시 우리 정부가 추방한 서울 주재 러시아 외교관도 ‘공식 위장’ 요원이었다.
그렇게 ‘사고’를 치고 추방되거나 소환된 요원들의 인사처리는 어떻게 될까. 제재가 없거나 있더라도 형식적인 조치에 그치는 게 관례다. 해외요원들은 국정원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인사처우는 국정원 전체 직원의 사기, 나아가 국익과 직결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지만 A씨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청와대가 A씨의 문책을 요구했던 것.
한 전직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청와대측이 ‘러시아와의 외교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A씨를 해직시킬 것을 요구하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간신히 설득해 해고는 면했지만 해외요원을 그런 이유로 자르면 누가 일을 하겠느냐”고 말했다.
드물긴 하지만, 해외공작원 중에는 ‘일’을 내고도 영전한 경우가 없지 않다. 10여년 전, 서방국가에 주재하던 요원 B씨가 현지 북한공관의 중요서류를 통째로 확보한 일이 있었다. 북측의 항의로 정황을 파악한 해당국 정보기관이 “남의 나라에서 이런 식으로 대담하게 절도 행위를 할 수 있느냐”고 문제를 제기하는 등 사건이 외교문제로 비화될 조짐을 보였다.
이에 우리측은 사과와 함께 B씨에 대해 즉각 소환이라는 ‘문책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표면상의 조치와 달리 B씨는 오히려 특진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A씨와 B씨 같은 ‘공식 위장요원’과 달리 상사주재원 등으로 위장한 ‘흑색공작원’, 즉 ‘비공식위장(Non-official Cover) 요원’의 경우 신분이 매우 불안하다. 이들의 경우 사고를 쳐도 외교관 면책특권을 요구할 수 없는 데다, 정보기관도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 마련이어서 최악의 경우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국정원은 정치에 개입했다가 코너에 몰리자 흑색공작원의 존재를 스스로 누설했던 전력이 있다. 97년 대선 당시 여권이 북한과 접촉해 북풍을 요청했다는 이른바 북풍사건이 불거진 98년 언론에 노출된 박채서(朴采緖)씨의 경우가 그렇다. 암호명 흑금성으로 불렸던 박씨는 손꼽히는 북한 전문 첩보요원이었으나, 여야의 정치공방 와중에 그 존재가 드러나 신분상 돌이킬 수 없는 불이익을 당한 결과가 됐다. 국정원은 당시는 물론 지금도 박씨가 국정원 요원이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94년 7월 8일 북한 김일성(金日成) 주석 사망 당시 안전기획부는 섣부른 정보공개로 ‘광의의 공작 요원’을 저버린 일도 있다. “김일성 사망 같은 중대사태가 벌어졌는데 정보기관은 도대체 이를 감지나 하고 있었느냐”는 여론이 비등해지자 안기부 수뇌부는 국회 국방위에 “7월 8일 당시 북한과 외국간에 이뤄진 통신 감청 등을 통해 북한에 중대사태가 일어났음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당시 안기부 실무자들은 그 같은 통신감청은 북한 주석궁 내에 ‘인적 자산’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고, 따라서 이를 공개하면 북한에 관련 정보를 알려주는 결과가 될 것이라며 국회 보고에 반대했지만, 수뇌부는 정치적 곤경을 타개하기 위해 이를 밀어붙였다.
한 전직 관계자는 “내가 듣기로는 국회 보고 몇 개월 뒤부터 북한 주석궁 내 우리 ‘인적 자산’과의 연락이 두절됐다고 한다. 필시 발각돼 처형됐을 것이란 얘기다. 우리로서는 복구 불능의 손실을 입은 것이다”고 말했다.
해외 정보원의 위상과 신분보장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 관계자는 “이처럼 국내 정치에만 신경 쓸 뿐 해외공작의 기본을 모르는 책상물림들의 섣부른 판단이 상황을 그르치는 경우가 없지 않다”며 씁쓸해 했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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