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한 이 말은 언론의 자유를 강조할 때마다 금과옥조처럼 인용된다. 이 말은 제퍼슨이 재야에 있으면서 프랑스 파리에 머물던 1787년 1월에 동료 에드워드 캐링턴에게 보낸 편지 내용 가운데 일부분이다.
▼국민 알권리 침해 비난 자초▼
제퍼슨은 1800년 대통령에 당선되고 1804년에 재선된다. 재선 임기 말인 1807년 6월에 존 노벨이라는 사람이 그에게 신문을 가장 유익하게 경영하는 방식이 무엇이냐고 물은 데 대한 답신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문에 나타난 것은 이제 아무 것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 오염된 매개물에 실리게 되면 진실조차도 의심을 받게 됩니다. (중략) 나는 신문을 전혀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이 신문을 읽는 사람보다 오히려 세상사를 더 잘 알고 있다고까지 말하겠습니다. 이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거짓과 오류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진 사람보다 진리에 더 가깝다는 것과 마찬가지 뜻에서입니다.”
당시 미국은 정파신문이 난립해 정적에 대한 인신공격과 중상모략이 난무하던 상황이었음을 감안할지라도, 언론의 자유주의 사상이 형성되는 데 크게 기여했던 제퍼슨의 신문에 대한 태도가 대통령이 된 뒤 이처럼 극단적으로 변했다는 것은 대통령과 신문의 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좋은 사례라 하겠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미국의 대통령들도 집권 기간에 때때로 언론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 미국뿐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만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언론이 민주주의에 필수불가결한 제도이며 언론의 자유가 으뜸가는 기본권임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신문에 대한 불만을 서슴없이 표명해 왔다. 특히 특정 신문사들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 같은 노 대통령의 태도는 겉으로 보기에 다른 나라 대통령들이 언론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 같은 대통령의 의견 표명이 정부와 언론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데 유의해야만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의 언론관이 바로 정부와 언론의 관계를 규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뒤 취해진 사무실 방문취재금지, 취재원 실명제, 엠바고 폐지, 언론 취재에 응한 공무원으로 하여금 사후에 이를 보고토록 한 규정, 그리고 21일 이병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이 동아일보의 취재에 불응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들은 모두 대통령이 피력해 온 언론관과 무관치 않다.
이러한 조치들은 결국 참여정부가 국민의 알 권리를 제한한다는 지탄을 받게 만들었다. 국민의 알 권리란 언론기관으로서는 정보의 공개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만 아니라 정보를 취재할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정부가 취한 취재 제한 조치들은 정부가 국민의 알 권리를 제약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왜 굳이 참여정부가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를 제약한다는 지탄받기를 자초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적대적 태도 국정운영 장애물▼
참여정부의 언론에 대한 일련의 경직된 대응은 원만한 정부 기능 수행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정부는 공공정책의 수행을 위해 국정의 목표와 의도를 국민에게 알리고 설득해 국민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는 언론매체를 통해 비로소 효과적으로 수행된다. 따라서 언론에 대한 적대적 태도나 언론의 버릇을 고치겠다는 발상 등은 정부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장애물이 될 뿐이다.
국민은 정부가 국가발전을 위해 원활하게 국정을 수행해 주기를 바란다. 국민은 정부의 태도로 인해 정부와 언론의 갈등관계가 지속됨으로써 국정에 지장이 초래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정부가 주도적으로 감정의 매듭을 풀어 정부와 언론의 관계가 대통령이 강조하듯 ‘건전한 견제’의 관계로 정립되기를 기대해 본다.
유재천 한림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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