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는 잘 모르고 지내다 위기가 닥쳤을 때 비로소 그 고마움을 깨닫게 되는 것이 군의 존재이다. 그런데 당장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안보문제가 아니라 이라크의 치안유지를 위해 파병이 거론되고 있으니 마음이 복잡하기만 하다.
우리 군은 과연 분단 상황에서 국토와 국민의 안녕을 지키는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해외 분쟁지역의 치안까지 떠맡을 수 있을 만큼 역량이 커진 것일까. 적어도 미국의 눈에는 그렇게 비치는 것 같다.
얼마 전 서울을 다녀간 미국의 한 전직 외교관은 사석에서 기자에게 한국의 이라크 파병 당위론을 주장하며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군만큼 잘 훈련돼 있고 믿을 수 있는 외국군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가 한국군을 치켜세운 의도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우리 군이 1990년대 이후 걸프전쟁과 서부사하라, 동티모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서 다국적군 또는 유엔평화유지군(PKF)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현지인들에게서 긍정적 평가를 받아온 점을 고려하면 그의 말이 사실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올해 건군 55주년을 맞는 우리 군은 ‘6·25’, ‘5·16’, ‘12·12’ 등 변란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이를 극복하고 이젠 해외 분쟁지역에서 특정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남의 눈에 비칠 만큼 성장했다.
그러나 군에 대한 우리 내부의 평가와 대우는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다. 과거 일부 ‘정치군인’들의 잔상(殘像)이 아직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탓일 것이다. 게다가 시대상황의 변화로 국민들의 안보의식이 느슨해지고 있고, 일부에선 병역을 기피하려는 풍조마저 있어 요즘 군복을 입고 긍지를 느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최근 태풍 ‘매미’로 인한 수해 복구에 구슬땀을 흘리는 장병들을 보면 그들의 수고에 코끝이 찡해진다. 평소엔 훈련으로 지친 몸을 제대로 눕힐 침상이 부족해 내무반에서 ‘칼잠’을 자고, 변변한 세면시설마저 갖춰지지 않은 열악한 환경에서 안보를 위해 고생하면서도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 군의 현주소이다.
안타까운 것은 국민과 국가를 위해 묵묵히 고생하고 있는 군을 어쩌면 ‘국익’이라는 명분 하에 이라크로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최근 김수환(金壽煥) 추기경 등 종교계 원로들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유엔의 결의를 얻어 비전투병을 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한 것도 파병 요청을 완전히 피하기는 어려운 현실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비전투병이라도 생명의 위협에 노출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전투병보다는 ‘불의의 희생’이 적지 않겠느냐는 원로들의 고언이 아닌가 싶다.
이라크 파병은 철저히 국익에 입각해 결정해야 할 문제이지만 만일 파병을 결정할 경우 그 짐은 고스란히 군에 지워질 수밖에 없다. 평소에 썩 잘해주지도 못하면서 국익을 위해 죽음을 무릅쓸 것을 군에 요구하는 것은 노무현 정부에도 상당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이틀 뒤면 국군의 날이다. 앞으론 군이 ‘국민의 군대’로서 긍지를 느끼고, 어깨를 활짝 펼 수 있도록 이날이 평소의 고마움을 모아 따뜻한 성원을 보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한기흥 정치부 차장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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