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프랑스군 장교 드레퓌스는 1894년 독일군의 첩자라는 혐의로 체포돼 1896년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러한 근거 없는 판결에 저항해 에밀 졸라 등 저명한 문인과 지식인들이 ‘나는 고발한다’란 문장으로 시작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투쟁은 기본적으로 가톨릭 보수주의자들과 유대인 자유주의자들 사이의 이념적 싸움이었다.”
송씨는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에 의해 자신이 북한 공작원으로 ‘부당하게’ 지목된 점 △이 과정에서 진보와 보수 언론간 갈등이 심화된 점 △일부 진보 지식인들이 연대 서명을 하며 그러한 주장의 부당성을 제기한 점 등이 드레퓌스 사건과 닮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가톨릭신자로 기득권층에 속하면서도 용감하게 드레퓌스 편에 섰던 ‘피캬르’라는 인물을 소개하며 “한국 사회에 드레퓌스는 많아도 피캬르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달 29일 준법서약서에 서명한 송씨는 2000년 8월 출간한 책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한겨레신문사 간) 266쪽에서 “왜 내가 종이쪽지에 불과할 수도 있는 준법서약서에 서명하지 않는가”라고 자문한 뒤 다음과 같이 답했다.
“사상을 준법서약서라는 과거의 틀에 가두어두고 민족의 화합이나 통일의 새 시대를 절대로 열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록 요식행위라고 할지라도 나는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온갖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수십년 동안 양심을 지켜온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의 인간 승리의 기록을 욕되게 할 수 없다는 동시대인으로서의 책임이 나로 하여금 준법서약서를 거부하게 만든다.”
결국 송씨는 “나는 김철수”라고 시인하며 서약서를 쓰고 대국민 사과문까지 발표함으로써 한국 사회를 향해 던졌던 그의 비판적 성찰이 그대로 부메랑이 돼 자신의 도덕성에 흠집을 냈다. 송씨의 귀국을 위해 ‘시시포스처럼 무거운 바위를 계속 굴려 올려온’ 진보계 인사들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됐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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