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국민의 정부]<40>4부⑥NSC 상임위

  • 입력 2003년 10월 15일 17시 37분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서의 ‘공론’이란 절차를 거쳐 자신의 외교안보 정책을 관철시켰다. DJ가 2001년 10월 8일 오전 청와대에서 NSC를 소집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따른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서의 ‘공론’이란 절차를 거쳐 자신의 외교안보 정책을 관철시켰다. DJ가 2001년 10월 8일 오전 청와대에서 NSC를 소집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따른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1년 11월 14일 새벽. 금강산에서 진행되던 6차 남북장관급회담이 끝내 결렬된 직후 정부 대표단이 돌아온다는 ‘뜻밖의’ 소식이 임동원(林東源) 당시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보에게 날아들었다.

전날 저녁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회담이 어렵게 진행되고 있지만 합의문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던 임동원은 이 소식에 크게 당황했다. 결국 이는 DJ의 ‘분노’로 연결됐고, 당시 우리측 회담 수석대표였던 홍순영(洪淳瑛) 통일부 장관은 전격 경질됐다.

DJ 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A씨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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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영이 회담 결렬을 선언한 것은 서울 지휘부의 훈령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서울의 훈령은 인내심을 갖고 회담 합의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홍순영은 ‘내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위원장인데…’라며 이를 무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홍순영의 설명은 좀 다르다.

“회담 진행의 전권은 수석대표에게 있는 것이다. 될 수 있으면 회담을 성사시키는 것이 좋지만 어느 정도 국민에게 설명할 수 있는 선에서 합의해야 하는 것이다. 북한이 무리한 요구를 하는데도 무조건 회담을 봉합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 점에서 내가 회담 결렬을 선언한 것을 두고 훈령을 깼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무튼 당시 훈령 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상당기간 이어졌다.

임동원은 6차 장관급회담 이전은 물론이고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NSC 상임위 멤버들과 ‘협의’를 거쳐 장관급회담을 계속 이어가도록 해야 한다는 결론을 냈었다. 이는 DJ에게도 보고됐다. 따라서 홍순영의 ‘훈령 위반’ 문제는 NSC 상임위의 이름으로 내려진 결정에 반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점에서 홍순영의 훈령 위반은 DJ 정부의 NSC가 실질적으로 어떻게 운영됐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DJ정부 5년 동안 외교안보통일 분야의 최고 실세였던 임동원은 NSC 상임위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이는 물론 DJ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NSC 상임위와 임동원의 관계에 대해 DJ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B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정보를 갖고 있는 사람이 최고다. 상임위 멤버인 관계 장관들은 자신의 부서와 관련된 사항만 알지만 임동원은 중요한 현안 정보를 모두 사전에 꼼꼼히 검토하고 회의에 참석했다. 게다가 임동원은 대통령의 지근거리에 있으니 회의의 결론은 자연스럽게 그가 기대하고 구상하는 방향으로 정리되곤 했다.”

NSC 상임위는 DJ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햇볕정책 추진의 보루 역할을 했다. NSC 상임위가 비밀주의로 흘렀다는 비난도 있지만, 회의를 통해 정부 관련 부처가 각종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일관된 정책을 유지할 수 있었다. DJ는 NSC 상임위라는 장치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공론’으로 내세우곤 했다.

물론 NSC 상임위가 각종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북한을 배려하는 방향의 결론을 내놓은 것은 DJ의 뜻이 강력하게 반영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운영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특히 ‘남북관계 개선’이 NSC 상임위의 유일한 판단기준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임동원이 NSC 상임위를 독단적으로 운영해 북한에 햇볕을 쪼이는 결론만을 유도했다는 비판이었다.

외교통상부 고위직을 지낸 C씨의 설명.

“NSC 상임위에서 나오는 결론이 언제나 같은 방향이라는 점 때문에 북한에 대해 잘못된 사인을 보낸 것은 물론 대미 외교에서도 어려움이 발생했다. NSC 상임위를 통해 남북관계가 흔들림 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한국 외교의 전반적인 흐름 속에서 남북관계와 한미관계를 보는 전략적인 판단이 들어설 자리는 전혀 없었다.”

NSC 상임위의 독특한 구성도 회의가 항상 임동원 즉, DJ의 구상대로 움직이게 만든 요인이었다. 1999년 5·24 개각으로 구성된 외교안보팀 2기 멤버들이 특히 그랬다.

DJ 정부의 외교안보 분야에서 일했던 D씨의 설명.

“2기 NSC 상임위에 참여한 조성태(趙成台·육사 20기) 국방부 장관, 천용택(千容宅·육사 16기) 국가정보원장, 황원탁(黃源卓·육사 18기) 대통령외교안보수석은 모두 임동원(육사 13기)의 육사 후배였다. 상임위 회의가 끝날 때마다 이들은 임동원에게 90도 각도로 인사를 했다.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이던 홍순영은 나이로 따지면 자신은 육사 15.5기 정도 된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유일한 민간인 출신인 홍순영도 임동원이 나이지리아 대사를 지낼 때 공사로 함께 근무했던 경력이 있다.”

NSC 상임위가 임동원에 의해 전횡됐다는 비판에도 그럴 만한 근거가 있었다.

DJ 정부 5년 동안 NSC 상임위는 229차례 열렸으나 사전에 상임위 안건 등을 조율하는 실무조정회의는 70여 차례밖에 열리지 않았다. DJ 정부의 한 관계자는 “실무조정회의가 제대로 열리지 않다보니 부처의 세부사안을 잘 모르는 장관들로서는 임동원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임동원은 2001년 대통령외교안보통일특보로 임명된 직후에 열린 NSC 상임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불참한 일이 있다. 신설된 특보 자리는 NSC 상임위의 정규 멤버가 아니었기 때문에 임동원이 NSC 상임위에 나오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DJ는 이 얘기를 듣고 NSC 상임위 간사인 임성준(任晟準) 대통령외교안보수석을 불러 임동원에게 왜 참석 통보를 하지 않았느냐고 질책했다. NSC 상임위는 어쨌든 임동원에 의해 운영돼야 한다는 것이 DJ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결국 임동원은 NSC 운영 규정 11조4항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관계부처의 장, 기타 관계자를 회의에 출석하게 해 그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조항에 근거해 매번 초청 출석 형식으로 상임위에 참석했다.

NSC 상임위는 매주 목요일 청와대 서별관에서 열렸지만 임동원이 통일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99년에는 예외적으로 장관 집무실에서 열리기도 했다. 99년 6월 15일 1차 서해교전이 일어났을 때와 같은 달 20일 금강산 관광객 민영미씨가 북한측에 억류됐을 때 등 두 차례다. 이에 대해 당시 정부 관계자들은 “갑자기 회의를 소집했는데 장소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임동원의 막강한 위상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NSC 상임위에서 의견충돌과 논쟁이 벌어진 일도 종종 있었다. 2차 서해교전이 벌어진 2002년 6월의 경우가 그 한 예였다. 이날 회의에서는 우리 군의 피해가 막심했던 당시 상황에서 군 작전에 문제가 없었는지 신랄한 추궁과 비판이 이어졌다는 후문이다. 또 당시 DJ가 일본 요코하마(橫濱)에서 열리는 월드컵축구대회 폐막식에 참석하기로 한 일정을 예정대로 강행해야 하느냐의 문제를 놓고도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DJ는 결국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했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 고위직을 지낸 한 관계자는 “서해교전 직후 북한은 비밀채널을 통해 우발적인 일이라고 유감의 뜻을 전해왔다. NSC 상임위는 격론 끝에 서해교전이 의도적 도발이 아니라는 북한의 설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DJ와 임동원이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한 것은 이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처럼 NSC 상임위는 항상 확실한 정보와 근거를 갖고 결정을 내린다. 당시 언론은 교전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대통령이 외유에 나선다며 DJ의 방일(訪日)을 비난했지만 이는 남북 고위층간에 개설된 핫라인의 실상을 몰랐기 때문이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NSC 상임위 결정의 ‘근거’라는 것들이 대부분 비공개 사항인 데다, DJ의 입맛에 맞게 의도적으로 해석된 것들도 적지 않았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NSC 상임위 운영에 있었던 이 같은 모호성과 불투명성이 결국 DJ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신뢰를 손상케 하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것이 상당수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국가안전보장회의,DJ의 창작인가 YS의 유산인가▼

DJ 정부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는 김영삼(金泳三) 정부의 외교안보정책 과정에 대한 ‘반성’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DJ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NSC 상임위를 출범시키는 데 관여했던 전직 청와대 관계자는 “NSC 상임위를 만들게 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YS 정부 때 운영된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가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아 다음 정권에 교훈을 주지 못했다는 자성이었다. 다른 하나는 장관이 바뀌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회의체를 만들자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YS 정부의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는 회의 기록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단순히 ‘기록이 없다’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DJ는 기본적으로 YS 정부의 외교안보 협의체 운영 방식을 불신했다.

NSC 상임위 운영에 관여했던 한 관계자의 설명.

“DJ 정부의 핵심관계자들은 YS 정부 당시의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가 회의 결정 사항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는 등 부실하게 운영됐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외무부가 미국, 일본과의 접촉 및 협의과정에서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의 결정을 왜곡하기도 했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DJ 정부의 NSC 상임위는 사무처 직원이 회의록을 작성해 ‘상임위 합의사항’이라는 제목을 붙여 DJ에게 보고했다.

DJ 정부에서 외교안보 분야 고위직을 지낸 다른 관계자는 “DJ가 NSC 상임위를 통해 추구했던 것은 정부 외교안보 부처가 통일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었다. NSC 상임위 토론 내용은 소수의견까지 DJ에게 보고됐지만, 실질적인 최종 결정권자는 항상 DJ였다”고 말했다.

NSC 상임위 제도가 DJ 정부의 ‘창작품’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YS 정부 말기인 97년 10월 이미 NSC 상임위를 운영하려는 구상이 논의됐었기 때문. 당시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실의 실무자들은 미국과 독일 이스라엘 등을 방문해 외교안보 분야 협의체 운영에 대한 조사 작업을 마치고 NSC 상임위에 관한 윤곽을 잡았다. 이 때문에 DJ의 NSC 상임위는 YS의 회의체 운영 구상에 ‘기록문화’라는 살을 붙인 데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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