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갈등 해결해야 외교도 풀려 ▼
재신임 정국으로 꽁꽁 얼어붙은 국내 정치, 날로 어려워지는 국내 경제를 생각할 때 대외정책에서는 뭔가 일이 잘 풀려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화려한 대외 청사진은 거의 모두 국내 정치가 국제협상의 발목을 잡는, 소위 ‘퍼트남의 딜레마’에 빠지기 십상인 정책들이다. 즉 아무리 상대국 정상과 FTA에 관한 합의를 하고, 야심 찬 경제특구 구상을 발표해도 대통령이 개방에 따른 국내적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면 허사라는 것이다.
우선 한-칠레 FTA 비준이 가을 국회에서 한 치도 못 움직이고 있다. 오죽하면 9월 하원 비준을 끝낸 칠레가 상원 비준을 미루고 있겠는가. 무섭게 변하는 바깥세상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지역구 표밭만 바라보는 외골수 선량들이 문제다. 정치인은 그렇다손 치자. 더욱 놀라운 것은 대통령이 국제적으로 발표한 국정 어젠다에 대해 소위 ‘대통령의 사람들’조차 딴 소리를 한다는 데 있다. 요즘 장관들은 국정지표를 따르기보다는 소관 국내 이해집단의 대변인 역할에 더 충실한 것 같다. 보건복지부 장관의 경제특구 내 내국인 진료, 문화관광부 장관의 스크린쿼터에 대한 우직성, 그리고 일부 청와대 참모들의 이라크 파병에 대한 돌출발언 등이 그 예다.
이 같은 심각한 난국의 일차적 원인은 국회에도 있지만 대통령 자신이 국제무대에서의 발언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국내 이해집단간의 갈등조정을 위한 정치적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데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대통령을 보필해야 할 인물들이 제 역할을 못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당장 아쉬운 것은 싱가포르에 간 김에 리콴유 선임장관을 만나 한 수 배워오지 못한 점이다.
두 사람은 비슷한 방법으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민권변호사로 정권을 잡은 리콴유는 총리가 되자마자 180도 변신한다. 노동자와 서민을 진정 위하는 길은 친(親)노조-분배정책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을 통해 국민 모두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에 싱가포르를 동남아 중심국가로 만들기 위한 확고한 개방 비전을 제시하고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한다. 물론 처음엔 선거 때 밀어준 지지세력이 배신당했다고 불같이 일어났다. 그러나 리콴유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과거의 정치적 동지들과 결별한다. 선거캠프를 도운 사람과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사람은 다르다고 보고, 정치적 배경에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널리 인재를 등용한 것이다. 또한 부정부패의 일소 없이는 외국기업을 불러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집권 초기 부정스캔들에 연루된 자신의 오른팔과 다름없던 주택장관을 자살로까지 몰고 가는 분위기를 용인한다.
▼지지세력 '좁은 틀' 벗어야 ▼
물론 민주국가의 지도자인 노 대통령이 그렇지 못한 리콴유를 그대로 벤치마킹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히 배워야 할 점은 있다. 첫째, 대외적으로 일단 내세운 개방 어젠다에 대한 강한 정치적 추진력이다. 이에 따르는 국내 갈등 해결을 위해선 지금처럼 지지세력이나 특정 이해집단의 눈치 보기에 급급해선 안 된다. 지금 조용한 다수의 국민은 대통령의 개방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둘째, 코드보다 능력 위주로 ‘대통령의 사람들’을 대폭 갈아 치우는 결단이다. 전문성을 뒤로 하고 이념과 표밭에 집착하는 현재의 사람들을 데리고 좌충우돌하지 말고 리콴유처럼 재빨리 날렵한 준마로 갈아타고 국정 추진에 날개를 달라는 것이다.
안세영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교수 syahn@ccs.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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