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분명 긍정적 사태진전이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북핵 문제가 순조롭게 풀려 나갈 것이라고 낙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문제 해결의 첫 단추가 끼워졌을 뿐, 본격적인 협상은 이제부터가 시작이기 때문이다.
▼核포기-안전보장 순서가 쟁점 ▼
북한의 이번 변화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북한이 그동안 줄기차게 주장해 왔던 북-미 불가침조약 체결을 사실상 포기했다는 점이다. 이는 분명 의미 있는 변화다. 그러나 북한의 불가침조약 체결 주장은 ‘어느 시점에선가는 버리게 돼 있는 카드’였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94년 6월,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대북 불가침과 경수로 건설을 보장하는 내용의 서한을 보낸 바 있다. 이 서한은 북한으로서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것이었다.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으로 국제적 고립과 경제적 궁핍에 처해 있던 북한의 입장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서한은 북한의 앞날을 보장해 주는 획기적 사건으로 평가됐고, 대내적으로는 ‘장군님의 통 큰 정치의 승리’로 비쳤다.
북한이 조지 W 부시 정권에서 얻어내려고 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문건이었지 조약 그 자체는 아니었다. 설혹 불가침조약이 체결된다 하더라도 침공당하는 상황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을 북한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불가침조약 체결 주장은 일종의 협상 전략이었던 셈이다. 반드시 쟁취할 의도가 없는데도 강력히 주장하다가 일정 시점에서 철회하는, 유연한 자세를 보여 상대편의 양보를 이끌어내는 수법은 북한의 오랜 협상 행태다.
둘째, 북한이 부시 행정부의 ‘다자틀 내 안전보장’ 방안이 ‘선(先) 핵 포기, 후(後) 안전보장’을 주장해 온 미국의 기존 입장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먼저 핵 포기, 즉 무장을 해제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다자틀 안에서 안전보장을 해 준다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가소로운 짓”이라던 21일의 조선중앙방송 논평이 “부시의 발언이 우리와 공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고 동시행동 원칙에 기초한 일괄타결안을 실현하는 데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고려할 용의가 있다”는 25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 논평으로 바뀐 것이다.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불가침조약 체결 주장의 철회가 아니라, 불과 나흘 사이에 일어난 이 같은 태도 변화의 의미다.
어쨌든 이로써 북핵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풀리게 됐다. 부시 행정부의 유연한 태도 변화가 북한의 변화를 불러온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북한의 핵미사일 포기와 미국의 안전보장 및 외교관계 개선의 순서를 어떻게 정하는가 하는 점이다.
4월의 중국 베이징(北京) 3자회담과 8월의 제1차 6자회담에서 북한이 ‘새롭고 대범한 제안’이라며 밝힌 4단계 해법과 미국이 제안한 3단계 로드맵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요컨대 누가 먼저 행동을 취할 것인가가 핵심 쟁점이다. 북한은 동시행동 원칙에 기초한 일괄타결을 주장하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국이 먼저 행동을 취하라는 것이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이처럼 북-미간의 상호불신은 타협을 매우 어렵게 만들고 있다. 10년 전의 제1차 북핵 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북핵 문제가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자 94년 5월 클린턴 행정부는 급기야 외과수술식 공격(surgical strike)에 의한 전쟁 시뮬레이션까지 했다.
▼‘수용가능한 대안’ 한국이 찾아야 ▼
이제 한국 외교의 숙제는 명확해졌다. ‘완전하고도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형태’로 북핵 문제를 해결한다는 대원칙 아래 미국과 북한이 합의할 수 있는 행동 순서가 담긴 로드맵을 개발해 관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지금 이상으로 확보해야 한다.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결정 역시 이러한 원모심려(遠謀深慮)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신지호 서강대 겸임교수·국제정치학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