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은 겉으로는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투명하게 정치자금을 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상당수 그룹에서 관련 임원들의 검찰 소환에 대비하느라 내년 경영계획을 짜지 못하는 등 ‘경영 마비’ 증상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기업경영에 발목=보통 11, 12월에 대기업은 새해 경영계획을 짜느라 바쁘게 움직인다. 그러나 요즘 이들은 경영계획 수립은 뒷전이다. 계획을 짜야할 구조조정본부나 기획실 간부들이 바로 ‘조사대상자’들이기 때문이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내년도 사업 계획 수립에는 큰 차질이 없을 것”이라면서도 “실무부서의 분위기가 뒤숭숭하다”고 말했다. SK그룹 관계자도 “현재 내년도 경영계획을 짜고 있는데 정치적 요소는 고려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과감한 투자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관계자는 “지금 당장 업무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나 수사가 본격화되면 상황에 따라 업무가 늘어날 수도 있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며 “정당 사이의 갈등이 심화돼 대선자금을 둘러싼 폭로가 잇따르면 기업에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구조본 외에 생산 및 연구 현장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L그룹 관계자는 “계열사들은 내년 사업계획을 짜느라 분주하다”고 전했다. 일선에서는 ‘비록 고통이 있더라도 이번 기회에 정치자금 문제를 제대로 털고 가야 기업이 산다’는 견해도 많다.
▽장기화되면 대외신인도 하락 요인=재계는 대선자금이 잘못된 것은 사실이나 국익을 위해 하루빨리 마무리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10대 그룹 계열의 한 사장은 “대선자금을 낸 것으로 거론되고 있는 기업의 대부분이 외국인 지분이 높은 우량기업”이라며 “불법 대선자금이란 회계분식을 했다는 것을 뜻하므로 대선자금 문제가 확산되면 한국의 대외신인도가 떨어지고 외국인투자자들의 주식매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전경련 관계자도 “돈이 많이 드는 고비용 정치구조를 고치는 것이 선결과제”라며 “과거의 정치구조 아래서 기업의 정치자금 제공은 피할 수 없다”고 밝혔다.
홍찬선기자 hcs@donga.com
공종식기자 kong@donga.com
박 용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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