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불법 정치자금의 악취에 뒤덮인 듯한 지금도 향기 나는 돈이 적지 않다.
▼국민 못살게 하는 불법 정치자금 ▼
지난달 부산대에 305억원을 기부한 송금조 ㈜태양 회장이 다시 재산 1000억원을 털어 지역 인재 육성과 문화예술 지원을 위한 재단을 세우기로 했다. 지난해 사재 3000억원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한 이종환 삼영화학 회장은 기금을 5000억원으로 늘리기로 했다. 교통사고로 딸을 잃은 이상철 현진어패럴 사장은 도서관을 지어 달라며 서울 서대문구에 50억원을 내밀었다.
“장학금으로 학비 걱정을 던 학생 가운데 노벨상을 받는 학자가 나오는 것이 나의 꿈”이라는 80세 이 회장의 소망이 생전에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종환 회장, 송 회장, 이상철 사장의 뜻과 결단은 어떤 정치인이나 행정가의 ‘교육입국 지식강국’ 외침보다 위대하다.
값진 나눔, 아름다운 기부는 이 밖에도 많다. 한평생 허리 못 펴고 덜 먹으며 구겨진 돈 모아 남김없이 내놓은 거룩한 할머니들, 5년간 청소하다 주운 동전 7만9101원을 태풍 매미 이재민에게 쥐여준 환경미화원 장정기씨와 신호영씨….
고(故)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29년 전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세워 육영의 모범을 보였다. 박사가 된 330명을 비롯한 이 재단 장학생 2000명이 지금 각계에서 한몫씩 하고 있다. 삼성 이건희장학재단과 LG그룹의 장학문화사업도 평가할 만하다.
오늘의 SK 계열사가 2000억원의 비자금을 만들지 않고, 일부를 불법 정치자금으로 쓰지도 않은 채 경영의 정도(正道)를 걸었다면 선대(先代)의 명예와 기업의 ‘장학퀴즈’ 이미지를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비자금 챙길 돈을 교육재단에 넣거나 달리 사회에 환원했다면 더욱 자랑스러운 기업이 되었겠지.
다른 기업들도 법정(法定) 범위와 절차를 벗어난 정치자금 선거자금을 대지 않고, 검찰 수사에 긴장할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간의 교육문화 지원이 더 빛났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심하다는 반(反)기업 정서도 한결 가시지 않았을까. 정부도 국민이 사랑하는 기업에 함부로 규제의 칼을 빼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기업하기 좋은 나라, 투자하고 싶은 나라’가 되고 일자리도 더 늘어날 수 있겠지.
권력과 정치권, 일부 유권자와 선거꾼이 향긋할 수 있는 돈을 구린내 나는 돈으로 바꿔 버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경제의 혼미와 추락이 가중되지도, 대다수 국민이 그 피해자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거 때마다 깨끗한 한 표를 던진 유권자와 꼬박꼬박 세금 낸 납세자가 부패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오명과 멍든 경제의 고통을 덮어쓰지 않았겠지.
이 같은 가상의 선순환을 현실의 악순환으로 만든 원죄는 역시 권력과 정치권에 있다. 정상적 경제시스템을 무너뜨리는 정경유착의 해악은 한보사태 이후의 외환위기 과정에서 충분히 겪었다. 그런데도 변한 게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선 승리 다음날인 1997년 12월 19일 “모든 기업을 권력의 사슬로부터, 권력의 비호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허언(虛言)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과 측근들이 청와대의 ‘칼국수 식탁보’ 밑에서 부패의 잔치를 벌였듯이 김대중 정권에서도 잔치는 이어졌다. 저 감옥이 조금쯤 말해준다.
▼유권자 납세자가 행동할 때 ▼
작년 노무현 후보 진영의 희망돼지 저금통은 기막힌 위장(僞裝)이었다. 대선 이튿날 노 당선자는 “우리 국민은 사상 최초로 수십만 유권자의 자발적 성금과 자원봉사를 통해 대통령을 당선시켰다. 그토록 열망했던 정치의 혁명적 변화가 이미 시작됐다”고 했지만 우습게 되었다. 한나라당은 말할 것도 없다. 구악의 박물관을 차려도 넉넉할 듯하다. 이런 정치권이 ‘검은돈 정치’의 악취를 스스로 걷어낸다?
유권자와 납세자가 일어서야 한다. 국민의 분노, 민심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 우선 살고보자고 내놓는 개혁 포장 속의 꼼수를 가려내고 거부해야 한다. 그리고 투표장에서 돈 정치의 장본인들을 솎아내야 한다.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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