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은 분점(分占)정부(divided government), 풀어 말하면 여소야대의 상황이다. 그것도 야당이 합심하면 의석의 3분의 2를 쉽게 넘을 수 있을 정도로 불균형적인 여소야대이다. 이런 상태에서 제왕적 대통령제 운운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개헌보다는 정당간 합의로 결정을 ▼
그동안 언론과 학계에서는 한국의 정치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병폐의 하나로 제왕적 대통령제를 꼽았다.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한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원론적으로는 맞다.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원내 상황이 여당에 비해 야당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불균형 상태로 바뀌어 국회가 대통령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야당은 관성적으로 이 논리만을 들먹이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들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이면에 ‘대통령 무책임제(presidential unaccountability)’라는 더 심각한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에서는 권한이 클수록 책임 또한 커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대통령은 모든 권한을 다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 걸맞은 책임은 지려고 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공(功)은 모두 차지하려고 하지만, 문제가 생겼을 경우 스스로 책임지기보다는 속죄양을 찾기에 급급했던 것이 한국 정치의 관례였다. 이때 가장 손쉬운 속죄양이 총리나 장관이었다. 만약 이러한 대통령의 책임전가 습관에 대통령 자신의 자질과 능력 부족까지 더해진다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 정치가 기능마비 상태에 빠진 것이 단지 제왕적 대통령제 탓만은 아니다. 가장 강하게 보이는 대통령이 가장 무책임한 대통령이 되는 이율배반성이 한국 정치를 현재와 같은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다. 여기에 분점정부 하에서 수적으로는 다수이면서 책임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는 야당의 공헌(?)도 적지 않다.
책임총리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는 이러한 문제점을 교정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한을 총리에게 분산시켜 책임을 지움으로써 대통령의 제왕적 성격을 완화하고 동시에 대통령의 능력 부족에서 오는 위험부담을 분산시킬 수도 있다. 아울러 덩치에 걸맞은 책임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원내 다수당에 국정 책임을 분담시키는 효과도 기대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위해 개헌까지 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현행 헌법 하에서도 국민적 합의를 기초로 운용의 묘를 살리면 유사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각 당이 총선 전에 다음과 같은 협약을 맺는 것이 필요하다. 총선 결과 과반수 의석을 얻은 정당이나 정당연합에 책임총리를 지명할 권한을 주고, 그에게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나머지 분야에 대해 국정책임을 맡기겠다는 협약이다. 이것은 국민 앞에서 체결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협약(social pact)의 성격을 띨 것이며, 그 점에서 정치인들끼리 밀실에서 맺는 약속과는 다르다.
▼‘예비내각-공약’ 국민이 선택하게 ▼
이런 협약 위에서 각 당은 내년 총선부터 예비내각의 명단과 선거공약집을 내걸고 국민의 심판을 받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총선을 더 이상 정치꾼(politician)들의 싸움이 아닌 국정책임자(statesman)들의 경쟁으로 격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고, 아울러 총선 전에 체결한 사회적 협약에 무게를 실어주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도 권력구조 때문에 개헌을 거듭하는 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행 헌법을 기초로 한 ‘1987년 체제’는 최선은 아니지만 지킬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피와 땀이 배어 있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김일영 객원논설위원·성균관대 교수·정치학 iykim@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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