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이라크 파병, 미국이 변했다면

  • 입력 2003년 11월 14일 18시 22분


미국의 대(對)이라크 전략이 내년 중 조기 주권 이양을 검토하는 방향으로 급선회하고 있다. 비교적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던 이라크 남부 나시리야에서 발생한 폭탄테러로 이탈리아 군경 등 31명이 사망할 정도로 사태가 악화되자 미국이 ‘발 빼기 작전’을 서두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미 언론이 제기한 이라크 조기 철군을 부인했지만 주권 이양이 빨라지면 외국군 철수 또한 앞당겨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정책 변경은 우리 군의 파병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상황 변화다. 정부의 파병 추진이 미국의 요청에 따른 것인 만큼 미국이 변한다면 우리의 전략도 조정하는 것이 당연하다. 청와대측은 노무현 대통령이 11일 ‘3000명 이내에서 재건지원 위주의 부대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으나 그 같은 지침은 미국의 정책 변화를 고려한 것이 아니므로 적절하게 조율될 수 있다고 본다.

사실상 이라크를 통치하고 있는 미국이 정책을 바꾸는데 이전의 판단을 토대로 파병 문제를 다루는 것은 맞지 않는다. 이탈리아 군경에 대한 테러 이후 각국의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도 자위대 파병을 내년으로 미루지 않았는가. 정부가 새로운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파병에 반대하는 국민을 설득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음 주 서울에서 열리는 한미연례안보협의회가 매우 중요하다. 미국은 이라크 정책을 상세히 설명하고 파병에 대한 납득할 만한 근거와 자료를 제시해야 한다. 악화된 현지상황은 무시하면서 미국의 필요에 따라 파병을 압박하는 모양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부는 한미동맹관계를 고려해 고심 끝에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한미동맹관계가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파병 결단이 옳다고 본다. 그러나 미국의 요청이 우리 군의 파병능력과 국민의 우려, 국내외 상황변화를 고려할 때 과도하다고 판단되면 수정을 요구해야 한다. 파병을 하더라도 가능한 한 안전성을 높이는 것이 정부의 할 일이다.

우리는 본란을 통해 수차례 파병에 관한 견해를 밝혔다. 미국의 파병요청,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 채택, 노 대통령의 파병 결정 등을 거치면서 대통령이 국익과 주권을 잣대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파병은 한순간의 판단이나 소수의 의견에 좌우될 사안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국내 상황은 물론 변화된 국제상황까지 충분히 고려해 현명하게 대응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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