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갑식/스크린쿼터 ‘盧心’ 뭔가

  • 입력 2003년 11월 23일 18시 46분


“나는 한국 영화산업이 스크린쿼터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도 계속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영화인들이 반대한다면 일방적으로 처리하지는 않겠다.”

‘한미투자협정 저지와 스크린쿼터 지키기 영화인대책위원회’(공동집행위원장 안성기 정지영)가 21일의 기자회견에서 전한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제)에 대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발언이다.

19일 대통령과 영화인들이 청와대에서 면담하는 자리에서 나온 이 말은 스크린쿼터를 축소하겠다는 뜻일까, 아니면 현행 수준을 유지하겠다는 것일까. 대통령의 말을 놓고 청와대와 영화계의 해석은 영 딴판이다.

‘노심(盧心)’을 꿰뚫고 있다는 윤태영(尹太瀛) 청와대 대변인은 20일 오후 브리핑에서 노 대통령의 말은 “당장 밀어붙이지는 않겠다는 취지”라고 밝혔다. 그러나 대책위는 기자회견에서 윤 대변인의 해석을 강하게 반박했다. 노 대통령이 영화인들과의 면담에서 “영화인들이 반대한다면 일방적으로 처리하지는 않겠다”고 말한 것은 사실상 스크린쿼터를 축소하지 않겠다는 견해를 밝힌 것이란 게 영화인들의 해석이다. 한 영화인은 “스크린쿼터를 줄여도 한국 영화계에는 별 영향이 없다는 식으로 청와대 관료들이 대통령에게 부정확한 보고를 하는 것 같다”며 “노 대통령이 미국보다는 국내, 즉 재계나 외교통상부 관료들에게서 압력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영화인들의 주장처럼 대통령 측근들이 ‘노심’을 왜곡한 것일까, 아니면 영화계가 대통령의 말을 아전인수식으로 확대해석한 것일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노 대통령의 발언이 양쪽 모두에게 자기 식대로 해석할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발언에 일관성이 없는 점도 문제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19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참석했을 때 미국 타임워너의 휴 스티븐 부회장에게 “스크린쿼터 문제가 외국인 투자에 장애가 안 되도록 설득 노력을 계속해 가능한 한 이른 시일 안에 해결되도록 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발언이 전해지자 영화계는 이달 말 농성과 옥외집회 등을 갖겠다고 발표했다. 강경투쟁에 앞서 영화배우 안성기 명계남 문소리, 영화감독 정지영 이은씨 등 영화인 10명이 19일 오후 노 대통령과 면담을 가진 것인데 이 자리에서 나온 대통령의 발언이 문제를 더 꼬이게 한 셈이다.

결국 노 대통령의 애매한 화법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스크린쿼터 문제를 출구 없는 미로 속으로 밀어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갑식 문화부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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