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칼럼]올해를 이렇게 넘겨도 되나

  • 입력 2003년 12월 10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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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넘겨서는 안 되겠는데 하는 사이에 어느덧 세밑이 다가왔다. 그런 아쉬움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2000년-그게 어떤 해였던가.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 년이 열린다고 밖에서 떠드는 소리에 우리도 새천년맞이를 한다며 광화문 길을 막고 불꽃을 터뜨리고 난리 법석을 피우면서 정작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전혀 하지 않고 말았다. 한민족의 역사에 최대의 비극을 초래한 한국전쟁 발발 50년을 되새겨보는….

▼전쟁 포화 멎은지 꼭 50년 ▼

우리를 도우러 왔던 미국은 2000년부터 무려 3년 동안 한국전 참전을 기념하는 릴레이 행사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전쟁의 주무대요 당사자인 한국은 서양 달력의 2000년 잔치는 벌이면서 6·25 50주년을 남의 일처럼 넘기고 있으니…. 답답해하던 나는 한국전 50주년을 맞아 이 땅에 영원한 평화를 기원하는 기획안을 마련해 한 실력자를 찾아간 일이 있다. 그러나 한국전 50주년 얘기가 나오자 금세 그의 표정이 굳어지고 냉기류가 감도는 듯해서 그냥 물러나오고 말았다. 뒤에 알고 보니 당시 그는 6·15평양회담을 준비하는 밀사 역할에 여념이 없었던 모양이다.

요즈음 세대에겐 ‘역사’가 돼버렸지만 20세 전후에 전쟁을 만난 세대에겐 6·25는 아직도 산 체험이다. 그렇기에 올해를 그냥 이렇게 넘겨선 안 되겠다 싶은 것이다.

지금부터 꼭 50년 전 한국전쟁의 포화는 멎었다. 그러나 당시 ‘휴전협정 결사반대’라는 관제데모의 아우성 속에 맞은 7월 말 휴전협정 조인 소식보다 더 큰 충격을 준 뉴스는 그해 이른 봄의 스탈린 사망 소식이었다. 그 뉴스를 듣고 느꼈던 깊은 안도감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한 개인의 죽음 이상으로 한 시대의 죽음, ‘스탈린주의’라는 한 시대의 종언을 막연하게나마 예감했던 것일까. 레닌과 볼셰비키 혁명의 동지였던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부하린 등을 간첩, 배신자로 몰아 ‘피의 숙청’을 자행한 냉혈의 독재자 스탈린, 그가 간 것이다.

3월 초의 스탈린 사후 그해 여름(6월 17일)에는 동베를린에서 믿기 어려운 일도 일어났다. 노동자들의 공화국 수도에서 노동자들의 반정부유혈폭동이 발발한 것이다. 이 의거를 기념해 그때부터 통일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베를린시는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서쪽으로 뻗는 10차선 대도를 ‘6월 17일의 거리’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 잔인성과 냉혈성에서 참으로 충격적인 소식은 그로부터 다시 두 달 뒤, 한국전 휴전협정이 조인된 1주일 후쯤 평양에서 날아왔다. 1953년 8월 3일부터 6일까지 4일간 열린 북의 특별군사재판은 박헌영(朴憲永)의 심복 이승엽(李承燁) 이강국(李康國) 등 남로당 간부들을 임화(林和) 설정식(薛貞植) 등 저명한 월북문인들과 함께 ‘미군의 간첩’으로 몰아 사형에 처해버렸다. 그로부터 2, 3년 후엔 남로당 당수로 북한 정권의 부수상 겸 외무상을 역임한 박헌영마저 처형된다. 박헌영은 1919년 언더우드라는 미국 간첩과 접촉했고 1925년엔 일본 경찰에 공산당 지도자를 배신하는 밀정(密偵)행위를 했으며 북으로 넘어와서는 이승엽 등을 요직에 앉혀 인민공화국의 전복을 기도했다는 것이다.

이승엽이 누구인가. 그는 남북 노동당 합당 후 3명의 당서기 중 1인으로 6·25 때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시장이 된 사람이다. 경성제국대 출신의 공산당원 이강국은 남한에서 활동하다 체포령이 내리자 미군 고급장교의 애첩이 그를 위장시켜 월북시킨 이른바 한국판 ‘여간첩 마타하리 사건’의 주인공 김수임의 애인으로도 유명했다.

▼쉽게 잊혀지는 ‘비극의 역사’▼

북녘을 그리워하며 가족도 가산도 가문도 팽개치고 월북했던, 또는 월북 못했던 남한의 좌파에게 1953년 평양의 군사재판은 임화 등 월북 문인들이 되뇌던 ‘사회주의적 레알리즘과 혁명적 로맨티시즘’ 가운데 후자는 사라지고 전자만 잔혹한 현실로 덮친, 마지막 ‘진리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소련 및 동유럽에서 서서히 사라질 스탈린주의 시대가 한반도에선 이제 시작된다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1980년 광란의 신군부가 광주에서 대학살극을 벌일 때까지 한 세대 동안 남한에서는 어떤 의미 있는 친북 용공세력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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