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방폐장 사실상 백지화]정부 갈팡질팡…잃어버린 5개월

  • 입력 2003년 12월 10일 18시 53분


정부의 정책 혼선과 리더십 부재로 ‘최장기 미해결 국책사업’이 또 무산 위기에 빠졌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정부는 전북 부안군 위도에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건립을 추진하면서 △주민 현금보상 △연내 주민투표 실시 △위도에 청와대 별장 건립방안 등과 관련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였다. 청와대와 국무총리실, 행정자치부, 산업자원부 등은 대책이 나올 때마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 혼선을 부추겼다.

▽사태를 악화시킨 ‘널뛰기 정책’=윤진식(尹鎭植) 산자부 장관은 올 7월 26일 부안군을 방문해 “법을 개정해 위도 주민에 현금 보상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고건(高建) 국무총리는 현금보상 불가 방침을 밝혔고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도 같은 달 29일 “현금지원은 ‘법리와 상식’을 볼 때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8월 1일 김두관(金斗官) 당시 행정자치부 장관은 “가을이나 연말에 부안군에서 주민투표를 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자 산자부는 즉각 “주민투표는 할 수 없다”고 반박했고 9월 이영탁(李永鐸) 국무조정실장도 “위도 건립 방침에 변함이 없다”고 거들었다.

11월 주민투표안이 다시 불거지자 고건 총리는 “정부와 주민의 합의 하에 부안군민 주민투표를 연내 실시할 수 있다”고 말했다가 하루만에 ‘연내 주민투표 불가’로 돌아섰다. 또 노 대통령도 몇 차례에 걸쳐 주민투표에 부정적인 생각을 밝혔으나 결국 10일 산자부 장관 발표라는 형식을 통해 ‘주민투표 수용’으로 돌아섰다.

위도 청와대 별장 건립방안은 청와대와 산자부간 ‘엇박자’를 보여주었다.

윤 장관은 9월 기자간담회에서 “위도에 청와대 별장을 짓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말했으나 청와대는 “그런 방안을 검토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혼선 부추긴 리더십 부재=노 대통령은 8월 “대화가 이뤄지지 못하면 정부 방침대로 추진하겠다”며 위도 관리시설 건립 강행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부안 사태’가 악화되자 11월 26일 전북지역 언론사 합동 기자회견에서 “정부가 사태를 안이하게 보고 조금 오판한 것 같다”며 한발 물러섰다.

산자부 고위 당국자는 9월 ‘위도 백지화설’이 나왔을 때 “청와대에서 일선 부처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재검토 설(說)을 흘려 정책의 혼선을 줄 수 있느냐”며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조중근(趙重根) 사무처장은 “국책사업은 과감히 추진할 수 있는 정부의 리더십이 중요하다”며 “주민투표 방안은 리더십 부재를 포퓰리즘으로 해결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고영조 ‘핵반대 범부안군민 대책위원회’ 대변인은 “정부의 신뢰성 상실과 즉흥적인 정책이 부안사태를 불러왔다”고 말했다.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17년 국책사업 또 표류▼

17년을 끌어온 원전수거물 관리시설(방사성폐기물 처리장) 건립 계획이 다시 중대한 기로에 섰다.

정부가 10일 전북 부안군 이외의 지역에서도 신청을 받겠다고 발표한 것은 부안군 위도에 관리시설을 세우려는 계획이 사실상 어려워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산업자원부는 “주민투표만 통과하면 부안군에 관리시설 건립의 우선권을 주겠다”고 밝혔지만 현지 분위기를 감안할 때 주민투표에서 찬성으로 결론이 날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 많다.

‘부안 사태’의 홍역을 생생하게 지켜본 다른 지방자치단체들이 정부의 희망대로 선뜻 후보지 신청에 나설지도 의문이다.

▽투표 부결 우려한 고육책(苦肉策)=산자부에는 부안에서 주민투표를 실시할 경우 찬성 결론이 나기는 어렵다는 비관적 전망이 팽배하다.

이관섭(李官燮) 산자부 방사성폐기물팀장은 “아마 찬성은 30∼40%에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익명을 요구한 산자부 고위당국자는 “최근 실시한 부안군민 여론조사에서 주민의 85%가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건립에 반대했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 때문에 산자부는 가급적 주민투표 시기를 내년 4월 이후로 늦춰 ‘냉각기간’을 최대한 갖겠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더라도 ‘승산’이 그리 높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정부는 부안 주민투표의 부결을 예상하고 미리 다른 후보지 신청이라는 카드를 준비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또 주민투표 시기를 놓고 ‘핵반대 부안군대책위원회’와 정부가 맞서 있어 부안 사태도 여전히 불씨를 안고 있다.

▽17년 국책사업 수포로=부안 이외의 후보지로는 원자력위원회가 2001년부터 2년간 실시한 조사를 토대로 올 3월 선정한 울진 영광 영덕 고창 등이 꼽힌다. 올 7월 부안군이 선정되기 직전 유치 신청 움직임을 보였던 삼척도 일단 후보지로 거론된다.

인구 7만3000여명인 영광군은 7월 주민 3만여명이 서명한 원전시설 유치 청원서를 정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안사태의 ‘후(後)폭풍’이 워낙 큰데다 부안 이외의 후보지들이 올 상반기 주민 반대로 관리시설 유치 신청을 포기한 경험도 있어 신규 후보지로는 상당한 한계를 안고 있다.

다른 지자체들은 일단 부안군 주민투표 결과를 지켜본 후 유치 가능성을 타진할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만약 부안 주민투표에서 찬성이 많으면 관리시설 부지는 부안으로 확정되기 때문이다.

부안 주민투표 시기는 내년 4월 전후로 예상된다. 이 때부터 9월까지 다른 지자체가 주민 서명과 지방의회 통과, 토론회와 설명회, 주민투표 등을 치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부안군 주민투표가 부결되고 다른 지자체도 모두 신청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1986년부터 국책사업으로 추진했으나 매번 무산된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건립 계획이 이번에도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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