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아래 말에 등장하는 ‘나’와 ‘여러분’은 누구일까요?
“여러분 추우시죠? 여러분도 춥고 나도 춥습니다. 몸도 춥고 마음도 춥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작년 오늘 이 시각을 한번 돌이켜 봅시다.”
힌트:지난 19일에 있었던 어느 연설의 시작 부분입니다.
쉽게 맞히는 응답자가 적지 않겠지만 기록을 위해 답을 남기자.
답:나=노무현 대통령, 여러분=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 회원
▼적개심 불 지르는 대통령 ▼
혹시나 ‘여러분’을 실업자, 길거리 근로자, 먹고살기 힘든 서민, 양로원 할머니 할아버지, 노숙자 등으로 상상한 독자라면 실망했을지 모르겠다. 한번 가정해 보자. 이 겨울 들어 가장 추웠다는 그날 밤 노 대통령이 실제로 어려운 이들을 찾아나서 두 손 꼭 잡고 “추우시죠?” 했다면 어땠을까. 당선 1주년의 날에 노사모를 향해 또다시 전투를 독려하는 모습과 얼어붙은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모습, 어느 쪽이 더 대통령다웠을까.
노 대통령과 행사에 모인 노사모 회원1000명만 몸도 춥고 마음도 추운 게 아니다. 서울 서초구에 사는 주부 최모씨는 “서민들은 공과금을 내지 못해 단전 단수의 추위에 움츠리고 있다”고 신문에 썼다. 카드 빚 가정파탄을 넘어 생활고 인륜파괴의 비극이 끊이지 않는 세밑이다.
사정이 이렇건만 노 대통령은 “비방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서” 노사모 집회에 왔다고 밝혔다. 아무튼 이날 연설은 작년 이때를 돌이켜 보게 했다.
노 후보의 당선 일성(一聲)은 “저를 지지한 분들만의 대통령이 아닌, 저를 반대하신 분까지 포함한 모든 국민의 대통령으로 또 심부름꾼으로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한다”였다(국민들께 드리는 인사말씀). “갈등과 분열의 시대는 이제 끝날 것”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1년 뒤. 서울 여의도 행사장에 노 대통령이 나타난 순간까지도 노사모 회원들 사이에서 “국민통합 노무현짱”이라는 연호가 터졌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말은 달랐다. “우리는 승리했으나 그들은 승복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나를 흔들었습니다. 여러분의 혁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시민혁명은 계속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노사모 여러분이 아니고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위대한 노사모, 다시 한번 뛰어 주십시오. 춥습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다시 손잡읍시다.”
갈등과 분열의 시대를 끝낼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는 즉시 ‘대통령님! 또다시 진격명령을 내리신 거지요’라는 글이 떴다.
1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다. 노사모 집회에 나가기 사흘 전, 노 대통령은 특별기자회견에서 말했다. “대통령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이고 최종 책임자입니다. 우리 한국과 국민들이 힘을 모아 나아가야 될 방향이 어딘지 비전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합니다. 그것이 대통령의 직무이며, 따라서 안정감과 신뢰감을 함께 가져야 합니다.”
이 말이 귓전에 맴돌 때 노 대통령은 노사모 앞에서, 그리고 열린우리당 주연급들이 올려다보는 가운데서 적(敵)을 지목하고 적들에 대한 적개심에 불을 질렀다. “내가 어느 노사모 모임에서 우리가 세상을 바꾸었다니까 그 사람들은 아이들이 날뛴다고 터무니없는 상징조작을 퍼부었습니다. 천부당만부당한 억지주장임을 난들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노 대통령은 자신의 상징도 무너졌음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 하나가 ‘국민통합 대통령’이고 또 하나는 희망돼지저금통으로 포장된 ‘도덕성’이었다. “고기를 많이 잡는 경기에서는 떡밥을 많이 뿌려야 이긴다는 것 아닙니까. 내 그물에 한 마리도 안 들어오는데, 떡밥 안 뿌리고 버틸 장사 많지 않을 겁니다.”
▼국민 더 지치게 또 시민혁명인가 ▼
더 있다. ‘서민 대통령’이다. 노 대통령의 핵심 코드 그룹은 새 기득권을 거머쥐어 자신들의 팔자를 바꾸었는지 모르지만, 서민의 세상은 안 바뀌었다. 삶이 더 피곤해졌을 뿐이다.
노 대통령이 정녕 국민과 함께 가려면 시민혁명이 아니라 본인의 자기혁명, 코드혁명이 정답이자 마지막 희망이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으면서 시민혁명을 말하는 존재는 국정 최종 책임자도, 심부름꾼도 아니다. 노사모 앞에서 “나는 위대한 국민을 믿는다. 지난 40년간 경제를 100배나 키우지 않았나”라고 말한다고 배부를 국민이 얼마나 될까. 노 대통령이 정말 새해에는 막가지 말기를 기원한다.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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