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종의 한(恨), 노 대통령의 자신(?)
고종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열강을 상대로 다자(多者)외교를 펼친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는 사대관계에 있던 중국(淸)이 몰락하고 변방의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강대국 반열에 올라서는 엄청난 시대적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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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열국과의 교제는 아무리 친밀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인종과 종교가 다르므로 일국과 갈등을 초래할 때는 인종·종교상의 관계로 그 향배를 결정함은 자연의 추세이다…동양 각국의 독립을 유지하려면 가장 부강한 일본을 맹주로…”(일본외교문서 32권, 기밀 제71호, 1899년 7월 26일)
반면 현재 한반도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미국에 대한 노 대통령의 발언은 거리낌이 없다.
“미국이 세고 강하지만 (한국이) 자존심이 상할 만큼 종속적이지는 않다. 10년 안에 자주 국방을 한다. 10년 뒤에는 영국 독일 프랑스 정도의 발언력을 가질 것이고 대미관계도 변할 것이다.”(지난해 11월 20일, 한국청년회의소 임원단 초청 청와대 다과회)
고종이 을미사변(1895년 8월 20일)으로 명성황후를 잃고 일본의 간섭을 피해 아관파천(1896년 2월 11일)을 단행할 정도로 일본에 혹독히 당하고서도 이 같은 발언을 한 것은 그 무렵 서구 국가들의 도움을 통한 국권수호 노력이 무산되면서 더 이상 현실적 대안이 없었던 고민의 일단을 보여준다.
노 대통령의 발언은 강대국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역대 지도자들의 발언과 비교할 때 격세지감을 갖게 한다. 이는 긍정적으로 보면 대미 자주의식의 천명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달리 보면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냉혹한 외교안보 현실을 잘 모르는 소치라고도 할 수 있다.
과연 열강에 둘러싸인 한반도에서 자강과 자주는 가능한 것일까. 경희대 허동현(許東賢)교수는 “100년 전엔 자주가 불가능했으나 이젠 말로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자주적이기 위해선 힘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며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파워 폴리틱스(Power Politics)’엔 변함이 없다”고 강조한다.
# ‘미국 짝사랑’과 ‘반미주의면 어때’
고종은 러일전쟁 발발 직전까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중립을 꿈꾸며 미국에 의지하려 했으나 이는 ‘짝사랑’에 그쳤다. 한국산업기술대 서영희(徐榮姬) 교수는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규엔 침략을 당하면 돕는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으나 미국은 병원과 교회를 지었지만 외교적으론 단 한 차례도 돕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존 셔먼 미국 국무장관은 1897년 11월 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 주한공사에게 한국의 국가운명에 관계되는 문제에 상담역을 맡지 말고 한국과 어떤 종류의 보호동맹도 맺지 않도록 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미국은 이어 1905년 7월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桂太郞)의 밀약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1905년 11월 주한미국공사관을 철수했다. 서구 국가 가운데는 최초로 우리와 수교했던 미국은 일본의 강점을 앞두고 가장 먼저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한미관계가 혈맹으로 질적인 변화를 한 것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이다. 미국은 이를 통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개입했고, 한국은 미국에 안보를 의존한 채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한미동맹은 최근 한국의 반미감정 대두와 미국의 전력 재편 및 주한미군 재배치 움직임 등으로 인해 새 국면을 맞고 있다.
노 대통령이 후보 시절인 2002년 9월 대구 영남대 초청강연에서 “미국을 안 갔다고 반미주의냐, 반미주의면 또 어떠냐”고 발언한 것은 흔들리는 한미동맹의 좌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한미관계에 대한 의문은 수교 초기에도 제기됐다. 구한말 개화를 주도했던 주역 중 한 사람이자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기도 했던 유길준(兪吉濬)은 미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혹자는 말하기를 ‘미국은 우리나라와 우의가 두터우니 의지하여 도움을 받을 만하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미국은 우리의 통상 상대로서 친할 뿐이며, 우리의 위급함을 구해주는 우방으로 믿을 바 못된다.”(1885년 ‘중립론’)
# ‘동맹파’와 ‘자주파’를 넘어
외교안보팀의 한 고위당국자는 지난해 가을 미국의 요청에 따른 이라크 추가파병 결정을 내리기 전 사석에서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조상들의 사대주의를 탓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대가 아니었다면 민족과 국가가 생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핀란드는 옛소련을 사대했지만 옛소련은 붕괴했고 핀란드는 살아남았다.”
국가의 생존에 관한 것은 자존심보다 현실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솔직한 토로를 ‘동맹파’와 ‘자주파’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또 100년 뒤 우리의 후손들은 이를 어떻게 평가할까.
연세대 국학연구원의 정용화(鄭容和) 교수는 “자주파는 미국의 힘을 무시하는 것 같고, 동맹파는 기존의 관성에 따라 미국에 편승하는 것 같으나 둘 다 근시안적이다”며 “21세기의 자주는 미국이라는 파워를 우리에게 유리하게 끌어들여 우리의 자율성과 이익 극대화에 활용하는 자주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충남대 박찬승(朴贊勝) 교수 또한 “역사적으로 강대국이 약소국에 이용당한 전례는 없다”며 “용미(用美)나 용일(用日)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상대방 듣기에도 유쾌하지 않은 만큼 국가간 위상에 맞게 자주성을 가지면서 상대를 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한기흥기자 eligius@donga.com
▼'조선 중립국화' 이루어졌다면…▼
‘조선을 스위스나 벨기에 같은 영세중립국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숨 막히는 외세의 각축 속에서 좀처럼 활로를 찾을 수 없었던 조선과 대한제국이 마지막 희망을 건 것은 이 땅을 중립화하는 방안이었다. ‘대한제국의 대외정책’을 저술한 사학자 현광호(玄光浩)씨 등의 연구에 따르면 중립국론은 1880년대부터 제기됐다.
당시 조선 정부에 외교자문을 해 주던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조선이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선 벨기에 같은 영세중립국이 되어야 한다고 외무독판(外務督辦) 김윤식(金允植)에게 권고했다. 독일부영사 부들러(Budler)도 프로이센·프랑스전쟁(1871년) 때 스위스의 예를 들며 조선의 영세중립 선언을 1885년 김윤식에게 권했다.
비슷한 시기 만국공법에 의한 항구중립화를 주장한 유길준은 청나라가 주도하고 열국이 공동 보장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 국권을 수호할 힘이 없던 고종은 중립화에 큰 관심을 보이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종은 1899년 호러스 알렌 공사를 통해 열강에 의한 조선의 중립과 영토 보전을 미국에 요청했다. 1900년 8월엔 조병식을 특명공사로 일본에 파견해 아오키 슈조(靑木周藏) 외상에게 중립화에 동의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오키는 거절했다. 이유는 스위스와 벨기에는 중립화할 국력이 있으나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1901년 1월 러시아의 한반도 중립화 제안도 거절했다. 이 무렵 일본은 이미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주일공사 고영희가 1903년 7월 러시아와 일본의 개전이 임박했음을 보고해 오자 다급해진 고종은 그해 8월 일본과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 등에 특사를 파견해 중립화 가능성을 타진했다.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러일전쟁 발발 직전인 1904년 1월 21일 마침내 대한제국은 국외 중립을 선언했다.
서울 주재 프랑스 외교관 비콩트 드 퐁테네(Viconte de Fontenay)가 선언문을 작성했고 조선총영사를 겸임하고 있던 중국 주재 프랑스외교관이 이를 각국에 보냈다. 고종은 아예 영세중립국을 선포하려고 했다. 그러나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아무 효과가 없었다. 러일전쟁 발발 후 보름 만인 2월 23일 일본은 대한제국을 겁박해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일본의 동맹이 됐고 중립화를 통해 국권을 지키려던 고종의 꿈도 물거품이 됐다. 이후 한반도 중립화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한기흥기자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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