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1904 vs 2004]<4>국론 통합의 길은 어디에

  • 입력 2004년 1월 8일 18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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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와 근대.’ 위로는 왕실부터 아래로는 농민군까지 19세기 말∼20세기 초 나라를 걱정하는 모든 조선인들의 이상(理想)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자주와 근대 중 어느 것에 무게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입장들 사이에 대화와 연대의 가능성은 없었다. 집권층 내부에서는 나라보다 자신의 생존을 앞세운 권력투쟁이 외교정책을 흔들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지금 우리는 도약이냐 후퇴냐, 평화냐 긴장이냐는 세계사적 전환점에 직면해 있다”는 무거운 현실인식을 밝혔다. 성장의 동력인 ‘개혁’과 도약의 디딤돌인 ‘통합’이 위기를 타개할 근간이라고 했다. 봇물처럼 각계각층에서 개혁 요구가 터져 나왔던 지난 1년. 본보 조사에 따르면 하루 평균 1건 이상의 시위가 발생했다.》

#내부갈등으로 눈 먼 권력

1904년 1월 22일 중국 즈푸(芝부)에서 타전된 ‘대한제국은 러일전쟁 발발시 중립(中立)을 지킨다’는 내용의 전문은 열강의 허를 찌르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일에 누구보다 당혹스러워한 것은 바로 발신자인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타전될 전문 내용을 당일 아침에야 보았다.


21세기의 ‘자주국가’나 20세기의 ‘개화’는 어느 것 하나 국가의 존립을 위해 포기할 수 없는 가치. 그러나 이를 실현할 수 있는 힘은 한국사회 내부의 합의에서부터 나온다. 왼쪽은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오른쪽)과 나종일 대통령국가안보보좌관. 오른쪽은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 망명 시절의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왼쪽부터). -동아일보 자료사진·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

전문 작성을 총 지휘한 것은 고종 황제의 측근이자 이지용의 정적(政敵)인 탁지부대신 이용익(李容翊). 이지용은 명색이 대한제국 정부의 외교 수장이었지만 고종과 측근들이 준비하던 중립선언을 까맣게 모른 채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한일동맹안 타결을 놓고 물밑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대한제국 정치사를 연구해 온 한국산업기술대 서영희(徐榮姬) 교수는 “당시 권력갈등이 정책결정자들의 국제정세 보는 눈을 흐리게 만들었다”고 요약한다. 갈등의 두 축은 고종을 보위하는 측근세력과 정통 유자(儒者) 관료 출신의 원로 중신이었다.

북한 핵문제 등과 맞물려 이라크 파병이라는 민감한 사안이 돌출된 2003년. 참여정부 내 이른바 ‘자주파’와 ‘동맹파’의 미묘한 입장 차이가 여기저기서 불거졌다. 한 세기 전의 중립파와 동맹파처럼.

추가 파병 검토가 본격화된 지난해 10월 27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이종석(李鍾奭) 사무차장은 “파병 규모는 2000∼3000명선이 합리적”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튿날인 28일 윤영관(尹永寬) 외교통상부 장관은 정례브리핑에서 “NSC의 발언은 하나의 아이디어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다시 11월 11일 노 대통령이 ‘3000명 미만, 재건 중심으로 지원’ 원칙을 밝혔지만 그 직후 차영구(車榮九) 국방부 정책실장은 ‘전투병 위주의 파병 당위성’을 브리핑해 국민을 어리둥절케 했다. 이처럼 정부가 혼선을 빚는 동안 거리에선 이라크 파병 반대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100년 묵은 갈등구조

100년 전의 권력갈등은 단순히 내분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종과 측근들이 러시아 쪽으로 기울자 원로 중신들은 일본 쪽에 눈을 돌렸다. 일본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하야시 공사는 소외감에 분별력을 잃은 원로중신들을 돈과 감언이설로 공략해 친일(親日)의 첨병으로 만들어갔다.

집권층만 분열된 것은 아니었다. 을미의병과 동학의 잔존세력은 토지개혁 등을 통한 근대화를 추구하며 부패관료 타파를 주장했다. 일본에 망명한 박영효 유길준 등 개화파나 일부 개신(改新)적 유학자들도 각각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지만 서로 머리를 맞댈 여지는 없었다. 계층적 이해가 달랐고, 이를 통합할 지도자나 사회적 구심도 없었다.

‘일제강점기 천도교단의 민족운동’을 연구한 한국국가기록연구원 김정인(金正仁) 박사는 현재 한국사회의 갈등구조가 근본적으로 1세기 전에 제기된 자주와 근대 문제에 잇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과의 관계 재설정, 이라크 파병, 자유무역협정(FTA) 문제 역시 ‘어떻게 자주성을 지킬 것인가’라는 오랜 숙제의 현재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울과 지방의 격차, 계층간 이해의 충돌 등이 문제를 더욱 복합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동학운동이나 의병운동의 근저에는 18세기 후반 이래 성장한 이른바 ‘향유(鄕儒)’들의 중앙에 대한 뿌리 깊은 소외감이 있었다. 부안 핵 폐기장 문제도 중앙이 지방을 수탈한다는 해묵은 불신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사회가 통합의 주체 돼야

100년 전의 숙제를 여전히 떠안은 2004년. 차이점이라면 다양한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시민사회가 새로운 사회적 주체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는 커졌지만, 이를 통합해 공론(公論)화하는 기능은 100년 전에 비해 나아졌다고 할 수 없다.

우선 갈등구조가 보다 복잡해졌다. 고려대 조대엽(趙大燁·사회학) 교수는 세계화 정보화 등을 갈등구조의 새로운 변수로 꼽았다.

“현재의 문제는 친미냐 반미냐, 진보냐 보수냐의 것만이 아니다. 정보문화에 친숙한가 아닌가에 따라 세대간 갈등이 있다. 또한 세계화를 지지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노동자 농민문제에 대한 해법이 달리 나온다. 교육문제에서도 평준화 유지 여부가 계층 이해와 맞물려 심각한 사회적 골을 만든다. 이런 차이들이 중첩되기 때문에 해법을 찾기가 더 힘들다.”

연세대 김호기(金晧起·사회학) 교수는 완충역할을 할 중간집단의 부재를 문제점으로 꼽는다.

“진보부터 보수까지의 인구 구성을 그래프로 그릴 경우 선진국은 대개 가운데가 최고점인 포물선으로 나타나는데 한국은 김대중 정부 이래 쌍봉(雙峰)구조가 점차 강화되고 있다. 이는 생각이 다른 양쪽이 중간으로 수렴되지 않고 완강하게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뜻이다. 그만큼 대화의 여지는 없다.”

토론은 존중돼야 하지만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소모적인 논쟁은 무의미하다. 현재의 한국 상황이 그만큼 여유롭지도 않다. 차선의 합의라도 이루어내고 이를 수용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조 교수는 “시민사회가 스스로 공공성에 대한 자각을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의 시민사회도 이젠 ‘강제 없는 정부(政府)’라고 불러야 할 만큼 공적인 부문에서의 역할이 커졌으므로 공공의 이익을 위한 투쟁과 협조를 병행하는 유연성을 길러야 한다는 게 조 교수의 제언이다.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개화 주장 하면서도 실현방법 놓고 갈등▼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근대화는 지상의 과제가 됐다. 그러나 ‘근대화’에 대한 비전이 서로 달랐고 상호소통은 이뤄지지 않았다. 극단적으로는 개화세력간의 갈등이 근대화의 과제를 뒷걸음질치게 만들기까지 했다. 1884년의 갑신정변은 ‘서로 다른 근대상(像)’이 빚은 최악의 충돌이었다.

집권세력인 명성황후의 민씨 척족은 청과 사대(事大) 외교관계를 유지하면서 근대화를 추구하려 했다. 그 모델은 서양기술을 도입해 봉건의 틀 안에서 근대화를 추구했던 청나라의 양무(洋務)운동.

그러나 박영효 김옥균 등 갑신정변을 이끈 소장세력들은 청의 자장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은 근대화는 어불성설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들의 모델은 위로부터 주도해 강력한 근대국가를 만든 일본.

이들은 민씨 척족과 집권세력을 수구(守舊)로 몰아 유혈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연세대 사학과 김도형(金度亨) 교수는 “당시 집권층을 수구로만 몰아세울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당시 집권층도 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점진적인 근대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추구한 점에서는 현실적이었다는 것.

개화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재등장하는 것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다. 일본으로 망명한 개화파가 불안해 수시로 자객을 보냈던 고종은 일본이 러일전쟁 직전 한일동맹협약을 체결하자고 압박해 왔을 때도 거부하다가 망명객들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청일전쟁 후 친미 성향의 기독교세력이 급부상하면서 개화세력은 새롭게 재편된다. 입헌군주제를 지향했던 독립협회는 1898년 의회 창설 직전까지 갔지만 ‘공화정을 세워 왕을 몰아내려 한다’는 집권층의 모함에 빠져 고종에 의해 강제 해산된다.

김 교수는 개화세력의 한계로 자주(自主)를 염두에 두지 않은 점을 지적한다. 혼자 힘으로는 근대화를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해 외세를 이용하려 했던 게 결국 덫이 됐다는 것이다. 어떤 강대국도 자국의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고 약소국의 자강(自强)을 위해 힘을 빌려줄 리 없었다.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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