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최동진/외교는 코드로 되는게 아니다

  • 입력 2004년 1월 15일 18시 41분


일부 외교통상부 직원들의 대통령에 대한 ‘폄하’ 발언, 청와대 직속기관과 외교부간의 갈등, 핵심 외교라인에 대한 조사 등으로 며칠째 논란이 거듭되더니 급기야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이 문제를 직접 강도 높게 언급하고, 외교부 장관이 경질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대통령이 이토록 화가 난 데에는 ‘정보 유출’과 대통령 외교 노선에 대한 ‘오해나 이견’, 또는 한두 외교관의 ‘모욕적 언사’ 중에 어느 것이 주인(主因)인지 확실치 않다. 다만 대통령 언급의 톤으로 보나 지금까지의 경위로 보나 ‘모욕적 언사’가 가장 큰 요인이 아니었나 싶다.

▼외교관 언행 경솔했다지만… ▼

물론 언론을 통해 전해진 해당 외교관의 언행이 경솔하고 ‘부적절’하기는 했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면 모르거니와 그 정도를 갖고 국내외의 시선이 쏠려 있는 연두 기자회견 중에 대통령이 직접 언짢은 심기를 드러내고 인사조치 운운한 것 또한 그리 적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위 ‘괘씸죄’에 대한 처벌로 비친다면 국내적으로나 대외 이미지로나 대통령의 품위가 오히려 손상될 것이다. 권위주의적 절대 권력자가 아닌 성숙한 민주국가의 포용성 있는 지도자로서는 취할 자세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일부 외교관의 ‘정보 유출’을 거론했지만, 최근 중요 정보가 언론 등에 유출된 것 같지도 않다. 6자회담 등과 관련한 추측성 보도가 일부 있었지만 이 정도는 ‘국가기밀 유출’이나 ‘국익 손상’으로 확대 해석하기 힘들다. 외교부 장관 선에서 적절히 조치하고 마무리하면 될 사안이다. 이를 두고 다른 민주정부 국가에는 있지도 않는 대통령 직속 사정기관이 나서 심층조사를 하고 과중한 인사 조치를 한다면 사기 저하는 차치하고, 앞으로 어느 나라 외교관들이 우리 외교관을 신뢰할 수 있는 교섭 상대로 인정하겠는가.

외교부 장관까지 경질됐으니, 이 문제는 이제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문제를 침소봉대하는 것은 소위 코드 맞추기나 군기 잡기라고밖에 볼 수 없다.

우리 외교관들은 어쨌든 그 분야에서는 최고의 경험과 경륜, 지식을 갖고 있는 전문가들이다. 국익 우선의 냉혹한 국제외교 무대에서 우리의 국익을 확보하기 위해 고민하고 뛰는 외교관들에 대해 ‘의존적 외교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주적 외교정책의 기본정신을 갖추지 못했다’고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들은 결코 ‘미국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숭미(崇美)주의자’가 아니다. 다만 무엇이 보다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 냉철하게 따지고 그런 방향으로 움직일 뿐이다.

그들에게 맹목적으로 대통령의 ‘손과 발’이 되기를 요구하기보다 해당 분야에서 최고의 실무경험을 쌓은 전문가로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줘야 한다. 외교는 상대가 있기 때문에 독불장군이어서는 안 되며, 시시각각 살아 움직이는 외교 현실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국익손상을 가져올 수 있다.

▼큰틀 속 다양한 의견 존중돼야 ▼

대통령의 외교정책은 대선 공약에서 큰 틀의 방향성이 제시됐다. 대통령 자신의 언급대로 외교관들은 그 틀과 방향성을 ‘존중하고 성실히 실현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그 틀 안에서의 세부적 정책을 협의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관계자를 포함한 다양한 의견이 합리적으로 조정되는 동시에 그 정책의 집행 주체인 외교부의 의견도 존중돼야 실효성이 높아진다.

전문 외교관들이 정권 교체에 관계없이 흔들리지 않고 초당적으로 일관성 있게 직무에만 충실할 수 있도록 해주고 그들의 전문적 의견에 귀를 기울여줄 때 우리 외교가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외교는 코드 맞추기나 군기 잡기로 되는 것이 아니다.

최동진 전 주영국대사·인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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