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워싱턴 특파원으로 대미외교의 현장을 지켜본 기자는 일선 외교관들이 느낄 고충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대미관계에서 실리도 챙기고 자주도 관철하는 것이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력의 차이에 따른 한미관계의 불균형은 설령 ‘자주파’가 대미외교를 직접 맡는다고 해도 당장 달라지기는 어렵다.
2002년 3월 11일 백악관에서 열린 9·11테러 6개월 기념식 때 양성철(梁性喆) 당시 주미 대사가 아시아 지역을 대표해 연설한 적이 있다. 미국의 의도에 대해선 논란이 있었지만 주미 한국대사가 미국의 중요한 국가행사에서 그처럼 주목받는 역할을 한 것은 어쨌든 처음이었다.
평소에는 주미대사가 카운터파트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의 윗선을 면담하기가 쉽지 않다. 국무부 장관을 만나 현안을 협의할 기회도 한국에서 생각하듯이 그리 많지 않다. 미 대통령 면담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는 대미외교의 ‘현실’이다. 외교부 대미라인은 외교부에서 가장 우수한 그룹이지만 국력의 뒷받침 없이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을 벌이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일각에선 외교관들이 그런 현실을 핑계로 지나치게 미국에 저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니냐고 질타한다. 여중생 사망 사건이나 주한미군 범죄 등을 제대로 따지지 못하는 것을 준열히 탓하기도 한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대미외교에서 국민의 기대에 못 미치는 점이 있더라도 이를 확대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미관계는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자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력을 키우는 일이다. 엄밀히 말해 한국의 이미지를 향상시키는 것은 백악관에도 납품된 국산 컴퓨터 모니터를 비롯한 전자제품과 자동차 등 수출품의 질과 양이지, 자주외교 선언이 아니다.
과거에 일부 제3세계 국가에선 북한을 남한보다 자주적인 국가로 보는 시각이 없지 않았다. 북한은 미국에 맞서고, 남한은 미국에 종속돼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지금 북한이 대미관계를 개선하지 못해 안달인 것을 그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냉정한 눈으로 국제 현실을 보아야 한다.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지, 실속 없는 대미 자주를 부르짖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반세기를 다져온 한미동맹은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다. 미국이 다 잘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미국만 한 동맹국을 역사적으로 우리는 가져 본 일이 없다. 또 미국을 대체할 만한 우방을 달리 찾을 수도 없다.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할 외교안보 환경은 자주니 동맹이니, 반미(反美)니 용미(用美)니 하는 논란을 벌여도 좋을 만큼 한가롭지 않다. 21세기의 비전에 맞춰 미국과의 동맹과 파트너십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우리에게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이다.
한기흥 정치부 차장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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