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칼럼]촛불의 추억

  • 입력 2004년 1월 19일 19시 01분


치고 빠지기의 명수라면 권투에선 승률이 높고 도박이나 투기에서도 재미 볼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미 자주외교 리더십을 문제 삼아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을 쳤다. 그리고는 윤 장관보다 뿌리 깊은 미국통인 반기문 장관 카드로 빠졌다. 반 장관에게는 그와 유사성향인 대미 ‘의존적 외교’ 라인의 정리가 맡겨졌다. 그 대신 반 장관은 ‘자주’를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대통령이 전면에 나선 이 자주 파동은 득 아니면 실을 남길 수밖에 없는 중대한 외교행위였다. 빼고 더하기 셈법으로 제로섬이 될 수는 결코 없다. 노 대통령은, 그리고 한국은 재미를 볼까. 손익계산은 간단치 않다.

▼自主파동, 대통령의 계산은 ▼

우선 노 대통령은 미국 북한 그리고 제3국들로부터 어떤 득점 또는 실점을 할까. 국내적으로 유권자 지지를 높이는 데는 보탬이 될까. 국민은 경제 안보 등 국익에 도움을 받을까. 정권과 국가의 득실이 동행할지, 역행할지도 미묘하다. 노 대통령의 계산이 궁금하다.

노 대통령이 국익에 대한 냉철한 판단 없이 단지 자기통제에 실패함으로써 물을 쏟았다가 되담으려고 했던 건 아니길 바란다. 그간의 노 대통령을 지켜보면서 스스로를 말리지 못하는 일면에 대한 걱정도 없지 않았다.

리더십 연구의 권위자인 프레드 그린슈타인은 성공하는 대통령의 6가지 자질 가운데 정서관리 능력을 포함시켰다. 특히 자기절제와 감정처리 능력이 높아야 하고 정서적 부조화나 결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분명한 점은 국정과 외교는 투기나 도박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후자에서는 신뢰가 최고의 덕목이 아니지만 전자는 신뢰를 얻지 않고는 성공하기 어렵다. 국민의 신뢰, 상대국의 신뢰, 투자자의 신뢰가 출발점이다.

반미(反美)면 어떠냐고 했다가 미국 아니었으면 내가 북한 수용소에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 진의가 헷갈린다. 나에게 법과 원칙을 강요하지 말라고 했다가 법을 강조하면 도대체 뭐냐 싶다. 이번의 외교부 사태 전말도 모양새는 비슷하다.

일국의 대통령이 이렇게 치고 빠지면, 엎질렀다가 다시 퍼 담으면 신뢰는 못 높인다. 그 일이 국익과 결부되는 것이라면 대통령만이 아니라 국가적 국민적 손실이 된다.

이번 외교부 장관 교체극이 정권적 득실 판단에 따른 것이라면 더욱 문제다. 열린우리당 당의장 선거에서 2등한 신기남 의원은 외교부 장관 경질 직전에 숭미(崇美)주의자 청소를 선창했다. 그리고 숭미주의자를 기득권 세력으로 몰았다. 그는 노 대통령과의 교감 아래 신당을 만든 주역이다. 그의 외침을 들으면 역(逆)색깔론이 감지되고 지난 대선 때의 반미 촛불시위가 떠오른다.

촛불시위는 노 대통령이 탄생하는 상황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었다. 1980년대 폭력적 반미운동에 앞장섰던 문부식씨는 최근 저서에서 2002년 촛불시위 현장에는 자발적 촛불과 촛불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고 조직화한 깃발이 따로 존재했다고 증언했다.

이번 4월 총선을 앞두고는 자주 개혁세력과 숭미 기득권세력을 가르는 촛불과 깃발이 펄럭일까. 그러면 유권자들은 또다시 이분법의 최면 걸기에 넘어가게 될까.

▼“崇美척결”의 逆색깔 카드 ▼

정권을 잡은 세력은 그 순간부터 기득권 그룹이다. 진보를 말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은 놓지 않으려는 행태는 수구(守舊)다. 엘리트민주주의가 아닌 대중민주주의를 부추기지만 정권집단은 이미 엘리트다. 개혁의 화신인 척하면서 자기개혁은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반(反)개혁이다.

자주의 촛불을 켜면 투자가 늘고 기업이 더 투자하고 외자(外資)도 더 들어오고 일자리가 더 생기고 나라가 부강해져서 현실적 안보 위협에 대한 억지력도 커진다면 인사말까지 “자주합시다”로 바꾸자. 하지만 자주를 들먹일수록 경제와 안보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투자가 위축되고 그 악순환이 빚어진다면 이는 반(反)자주 국가의 길을 재촉하는 것일 뿐이다.

경제 살리고 일자리 만드는 데 집중하겠다고 약속했으면 촛불의 추억은 설혹 그립더라도 잊어야 한다. 그런 촛불은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복의 근원이 아니라 분열과 국력 소모의 화근이다.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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