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임채청 칼럼]'자위파'와 '동조파'

  • 입력 2004년 1월 20일 17시 04분


요즘 노무현 대통령은 ‘아닐 불(不)자’에 유독 민감하다. 대화 도중 불안 불신 불법이나 불확실 불투명 같은 말이 나오면 곧 긴장한다. 그리고 정색하면서 “그게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15일 언론사 경제부장단과의 오찬간담회는 그의 ‘불(不)자 알레르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 참석자가 ‘경제 불안감을 없애달라’는 민심을 전하자, 노 대통령은 “근거 없이 사람을 공격하기 가장 좋은 용어가 불안, 불확실 같은 것들이다”고 말을 받았다. 비슷한 문답이 꼬리를 이어 이날 간담회는 불안과 불확실에 대한 토론회처럼 돼 버렸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부 불안이란 말을 내세우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할 말 없으면 불안을 내세우는 그런 것이 좀 있지 않았나 싶다. 선거 때 마음에 안 들었던 후보라는 정서 같은 것을 딱 털고 생각하면, 지금의 경기상황 외에 정치적으로 별 불안요소는 없다고 본다.”

▼아닌 게 아닌 '불불(不不)논법'▼

노 대통령은 19일 전경련 회장단과의 오찬에서도 ‘사람들은 아니라고 하지만, 실은 그게 아니다’는 식의 불불(不不)논법을 사용했다. 그는 마무리 발언에서 “정책이 불투명해서 투자 못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사실 정책이 불투명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14일 연두기자회견에서도 그랬다. 시장의 불확실성 해소 방안을 묻자 “정책의 어느 부분이 불확실한지 항상 묻고 싶다”고 답변했다. 또 자신의 총선 양강구도 발언과 관련한 야당의 공세에 대해선 “불법이 아닌 것을 불법이라고 공격한다”고 했다. 16일 귀향길엔 이렇게 고향 사람들을 달랬다.

“지난 1년간 느끼기에 시끄럽고 불안한 것 같지요. 그러나 불안한 것도 혼란도 없었습니다. 살다보면 그런 느낌이 들기 마련이지요.”

어려운 시절을 많이 겪어본 노 대통령이 서민들의 고통과 험한 바닥민심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헛걸음질하기 일쑤인 새벽 인력시장 구직자들의 막막한 내일, 자녀에게 학원 과외를 시킬 여력조차 없는 사오정의 착잡한 귀향길, 공연히 친지들 눈길이 거북한 이태백과 삼팔선의 처진 어깨, 꽁꽁 얼어붙은 설 대목이 환란 때보다 더 힘들다는 영세상인들의 깊은 한숨을 그 역시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정작 누구보다도 불안해하고 불만스러워 하는 사람은 노 대통령 자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렇지 않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는 자기위안이자 다짐이고 주문(呪文)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불안’ ‘불안’ 하면 불안이 전염된다”는 그의 말에 짙은 초조감이 배어 있다. 자주파와 동맹파 같은 대립적 분류법을 원용하자면 노 대통령은 ‘자위파’, 불안에 전염된 사람은 ‘동조파’라 이름 붙일 수도 있겠다.

안타깝지만 자위파보다 동조파가 많은 게 현실이다. 굳이 여론조사 수치를 보지 않아도, 주위를 둘러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왜 이리 됐을까. 노 대통령과 가까웠던 한 정치인의 얘기에 음미할 만한 대목이 있다.

▼1년간 뜯어놓았으니 이젠…▼

“노 대통령은 사석에서 ‘가구를 들이면 계속 한 곳에 두는 사람, 수시로 옮겨 보는 사람, 심지어 뜯어보기도 하는 사람등 세 부류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자신은 세 번째 부류라고 했다. 그는 지난 1년간 기성질서를 해체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4월 총선 또한 그로선 정치권 해체의 기회로 여길 것이다.”

여기저기 뜯어서 늘어놓기만 한다면 사회가 안정될 리 만무하다는 게 이 정치인의 진단이다. 그렇다면 불안의 전염을 막기 위해 노 대통령이 할 일은 분명하다. 자기위안을 할 게 아니라 흐트러지고 어지러워진 것을 얼른 정돈하고 정리해야 한다. 그게 설 민심이기도 할 것이다. 더 늦어선 안 된다. 국민의 불안이 깊어지면 원성이 된다.

임채청 편집부 부국장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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