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의 ‘우왕좌왕’은 국내정치에서는 배제와 분열을, 대외정책에서는 국제적인 신뢰상실의 위기를 낳았다. 특히 북한핵문제, 이라크 파병, 한미동맹 등과 관련된 정책은 가히 갈팡질팡으로 일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오늘날처럼 나라의 대외정책이 대중인기영합주의에 휘둘리며 우왕좌왕한 적이 없었고, 한 나라의 외교를 ‘동맹’과 ‘자주’로 대립시킨 적도 없었다.
▼닫힌 외교로는 자주성 못지켜 ▼
간혹 성숙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행정부의 난처한 대외적 입장을 풀어주기 위해 국회나 여론이 ‘전략적’으로 제동을 걸어주는 경우는 있었어도 코드 집단이 생떼 쓰듯 국가원수의 발목을 잡거나 행정부가 코드에 맞는 대중을 동원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외교정책 수행에 있어 국내 여러 세력간의 소통을 거부하고 특정코드(이데올로기) 집단의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주장과 사고에만 집착하는, 일종의 ‘집단적 자폐증’을 보인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붉은 악마’의 집단적 열정과 에너지가 경제 살리기와 나라 살리기로 긍정적으로 승화돼야지 국수적 민족주의로 정치동원의 수단이 되면 파괴로 전락할 뿐이다.
100년 전 열강의 각축시대에 조선의 외교는 우왕좌왕이었다. 열강의 지배를 피하기 위해 고종은 ‘동맹을 통한 자주’를 표방하는 지혜를 선택했으나 국제정세 판단에 무감각하고 정치적 대립만 일삼는 참모들의 무능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갈파한 것처럼 ‘국내 정책의 실패는 국민을 좌절시키는 것으로 끝나지만 외교정책의 실패는 국민을 죽일 수밖에 없게 된다’.
100년 전의 실패는 힘과 국가이익추구 우선주의의 냉엄한 근대 국제정치의 본질과 제국주의적인 정세의 흐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당시 지배층의 무능과 무감각 때문이었지만 오늘날 우리 정부의 갈팡질팡 외교는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의 불확실성에 연유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이 모호하면 결국 대외 신인도와 신뢰성에 치명적인 손상이 초래된다. 과거 5, 6년 동안 우리의 대외 신인도는 서서히 무너져 내렸고 이제 동맹과 자주의 대립구도로 인해 거의 한계에 이르렀다.
자주든 개혁이든 국가목적과 국익개념의 일관성과 수행방법의 가변성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동맹력도 국력이고 국가자산이다. 동맹도 자주의 한 방법이다. 특히 수출주도형 국가이고 동북아의 전략적 충돌지역에 위치한 우리나라는 우방이나 동맹과의 협력 없이는 21세기 생존이 거의 불가능하다. 국가 지도자와 국민(일부이기는 하지만)이 동맹국에 대해 적대의지로 무장하고 나선다면 어떻게 국익을 신장할 수 있겠는가? 파괴와 해체의 논리로는 나라를 지켜낼 수 없다.
현대 국제사회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나라는 일방주의라고 비난받는 유일 극초강대국인 미국을 포함해서 한 나라도 없다. 그래서 나라마다 자국에 우호적인 지식인 전문가 언론인 등을 동원해 우호세력을 양성하고 활용한다. 오죽하면 막대한 국가예산을 지불하면서까지 대외 로비스트를 제도적으로 운용할까. 21세기에도 국제정치는 상호의존적인 적응과 상호활용을 통해 국가생존과 국익을 추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외교상의 자주와 자율성은 그 나라의 힘에 비례한다. 우선 힘을 키워야 한다. 닫힌 외교로는 자주성을 지킬 수 없고 국제 미아로 전락할 뿐이다.
▼대외적 신뢰부터 회복해야 ▼
자주는 구호만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간의 외교는 상대방의 핵심이익을 상호존중하면서 상호이익을 증진시키는 비영합(零合)게임이다. ‘열린 자주’라야 한다. 힘과 지혜와 자세의 유연성이 요청된다. 대중의 열정과 에너지를 국가발전의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지도층의 책무다. 오늘의 외교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국가의 ‘정상성’을 회복해 대외적 신뢰성부터 회복해야 한다.
류재갑 경기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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