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후 우리 외교에 자주라는 말이 하나의 원칙으로 명시된 것은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이 거의 처음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은 외세에 의존하지 말고 우리 힘으로 통일을 모색해 보자는 뜻에서 통일의 3대 원칙(자주 평화 민족)을 천명했는데 그중 하나가 자주였다. 7·4공동성명은 “남북문제를 국내 권력기반 강화(남한의 경우 10월유신)에 이용했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남북이 서로를 대화 상대로 인정한 최초의 합의였다.
이후 자주는 남북간 내적 관계보다는 각자의 대외관계에서 더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북한은 비동맹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주력했다. 종주국인 소련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나름대로 외교의 영역을 넓혀 나갔던 것이다. 한국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자주외교에 나선다.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해 벌인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 노력이 그것이다.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도 수교국 수를 늘려 갔고 급기야 소련 중국과도 관계를 정상화했다. 노태우 정권의 큰 업적인 이 북방정책의 성공은 자주외교의 결정판이었다.
자주는 내 나라의 안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나라와도 친하게 지내고, 필요하다면 동맹도 맺을 수 있는 주권국가의 자유 의지를 말한다. 나 홀로 선다는 뜻의 독자와는 다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북방정책을 내심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미국을 설득해 가면서 소련 중국과의 수교에 성공한 당시의 외교 주역들은 자랑스러운 자주파였다.
물론 1980년대 민주화 열풍 속에서 자주가 반미와 동의어로 인식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광주민주화운동이 낳은 시대 상황의 산물이었지 우리 현대사를 관통하는 진정한 자주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 이 시점에서 자주가 공격을 받는가.
자주와 독자를 혼동한 사람들로부터 일방적으로 매도당한 감이 없지 않다. 아무러면 자주파라고 해서 자주와 동맹이 동전의 양면이며, 한미동맹이 우리의 생존을 떠받치는 근간임을 모르겠는가. 자주파를 불문곡직하고 폐쇄주의자로 낙인찍는 것은 이성적인 대응이 아니다. 역으로 자주파가 동맹파를 사대주의자들이라고 매도한다면 이를 수용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자주파가 자주의 의미를 너무 좁게 해석함으로써 공격을 자초한 감이 있다. 그들은 기껏해야 자주를 반미쯤으로 여긴 듯하다. ‘친미는 굴종, 반미는 자주’라는 도식에 빠져 자주의 역사도, 그 의미도 제대로 몰랐던 것 같다.
자주는 반미가 아니다. 그 세계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이다. 냉전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올림픽을 유치했고 이를 통해 단숨에 공산권을 우리 품에 안았던 외교가 자주외교다. 자주파는 이제라도 그 흐름 위에 서야 한다.
이재호 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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