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오일발 INS=합동] 印度관리군은 중립국에 갈 것을 원한 八十八명의 잔류포로들을 인도로 갈 것을 납득시켰다고 발표함으로서 그들의 뒤를 봐줄 태도로 나왔다.
一 인도군 대변인은 七十四명의 북한출신 포로, 十二명의 중국인 및 二명의 한국출신 포로가 二月八日 출발할 인도군 수송선을 타고 동국으로 갈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포로들은 자신들의 고향땅으로 송환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동시에 전투하는 동안 포로로 된 側으로 돌아갈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였다 한다.
六十四명의 북한 출신 포로들이 미국으로 가기를 원했으나 미국은 중립국이 아닌 故로 거부당했다. 이들 포로들은 보다 더 적합한 장소가 발견될 때까지 인도를 임시로 택했다.
<1954년 2월 8일자 동아일보에서>
▼南과北, 인식 바뀐만큼 실체 변했나▼
소설 ‘광장’에서 최인훈은, 남쪽의 타락상에 실망해 월북했으나 ‘게으를 자유’도 없는 북쪽 현실에 번민하던 중 인민군 장교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포로가 된 주인공 이명준을 통해 그 시절 지식인의 고민과 방황을 절절하게 그려냈다.
하지만 76명(중국인 포로 포함 88명)의 그 절박한 사연에 대한 역사기록은 ‘무심’할 뿐이다. 54년 당시 동아일보는 위의 2단 예고기사에 이어 다음날 ‘인도감시군 1700여명 8일 인천 출항’이라는 1단 기사 말미에 이들 포로가 동행한다는 사실을 꼭 한 문장으로 언급했다.
당시 인도군은 6·25전쟁 포로교환 때 북송을 거부한 포로를 본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처리키로 한 정전회담 합의에 따라 3개월간 8153명의 포로 관리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53년 6월 18일 2만7389명의 ‘반공포로 석방’ 때 수용소를 탈출하지 못한 반공포로들로서 최종적으로 4800여명이 남한행을, 나머지는 공산측과 중립국행을 택했다.
문학평론가 김병익씨의 말처럼, 반세기가 지난 지금 남과 북의 이념과 실체에 대한 인식은 크게 바뀌었지만 이명준이 남한에 대해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었다”고 비판한 것이나, 북한에 대해 “당이 생각하고 판단할 테니 복창만 하라는 것”이라고 항의한 것의 진실성은 지금도 소진되지 않은 것 같다.
후일담 한 가지. 76인의 한 사람으로 인도행을 택했던 현동화씨가 2003년 펴낸 구술집 ‘격랑의 세월, 인도에 닻을 내리고’에 따르면 당시 인천항에서 인도군과 중립국행 포로들을 태운 배는 ‘광장’에서의 언급처럼 ‘3000t급 인도배 타고르호’가 아니라 ‘2만4500t급 영국배 아스토리아호’였다.
76인 중 인도에 잔류한 사람은 12명뿐이고, 나머지는 2년 뒤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지로 다시 떠나 상당수가 미국에 정착했다는 게 현씨의 증언이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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