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낮은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지역 내 5만여 전 가구를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가장한 자동응답시스템(ARS) 홍보를 최근 20일간 4차례나 실시했다”며 “그 비용만 회당 500만원씩 총 2000만원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A씨는 여전히 불안하다. “내 인지도와 지지도가 최고 상태일 때 중앙당의 여론조사가 실시돼야 하는데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는 것. 게다가 중앙당 여론조사 방식이 자신이 활용했던 ARS 전수조사에서 표본추출조사로 바뀌었다는 소문까지 들리고 있어 더욱 초조하다고 A씨는 털어놓았다.
열린우리당은 며칠 전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의 지역구인 서울 강남갑에 강금실(康錦實) 법무부 장관을 투입한 가상대결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한 핵심당직자는 “강 장관이 최 대표를 앞서는 것으로 나오자, 지도부가 흥분했고 ‘강금실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당내 여론이 더 높아졌다”고 말했다.
민주당에선 당 지도부가 앞장서 “여론조사를 통해 호남중진 물갈이를 하겠다”고 외치고 있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여론조사 만능시대’의 풍속도다.
16대 총선 때까지만 해도 여론조사는 ‘밀실 공천의 참고자료’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선 ‘인물 영입→당내 경선 후보자 압축→공천자 확정→총선 전략 수립’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여론조사가 맹위를 떨칠 것으로 보인다.
당내 경선이 돈과 동원선거로 얼룩질지 모른다는 우려도 여론조사에 의존하는 분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한나라당 최 대표는 사석에서 “(공천자를 결정하는 데) 여론조사만큼 정확한 것이 없다”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여론조사에 대한 맹신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코리아리서치센터(KRC) 김정혜(金貞惠) 이사는 “여론조사는 유권자의 선호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일 뿐 실제 투표 행위와 일치될 순 없다”며 “공천자 결정 등에 참고자료는 될 수 있지만 절대적 근거로 삼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실제 미국 등 정치 선진국들에선 한국처럼 여론조사로 당내 후보자를 뽑는 경우가 없다.
전문가들은 “각 당의 공천 신청자들이 여론조사에 대비하려고 홈쇼핑이나 텔레마케팅, 택배 회사로부터 지역주민의 연락처, 신상자료를 구하려고 혈안이 돼 있다”며 “탈법 불법 경선을 막기 위한 여론조사가 또 다른 불법을 조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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