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논란과 갈등이 많았던 한-칠레 FTA. 그러나 세계화와 블록화라는 세계경제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한국호(號)’의 앞날을 정말로 생각한다면 더 이상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일일이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다. 세계무역기구(WTO) 146개 회원국 가운데 한 건의 FTA도 발효시키지 못한 나라가 한국과 몽골밖에 없는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국에서 농업은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 지금 어디에 살든지 상당수 국민이 ‘농민의 아들과 딸’이다. 정서적으로는 그 비율이 훨씬 높다. 경제원리에 맞느냐와 별도로 제대로 된 농업 구조조정을 어렵게 한 중요한 원인도 여기에서 오는 ‘국민정서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자.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이후 중앙정부예산 62조원을 포함해 총 82조원이 농업분야에 투입됐다. 하지만 상당액이 쓸데없는 곳에 낭비됐고 농업의 경쟁력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농업전문가들은 “이럴 바에야 차라리 UR협상 때 개방 폭을 더 넓히는 것이 국민경제적 관점에서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올해부터 10년간 또 119조원이 농업분야에 추가 투입될 예정이다.
1950년대 한국과 이집트의 1인당 국민소득은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 이집트의 1인당 소득은 한국의 약 20%에 불과하다. 이 같은 차이를 가능하게 한 1차적 원동력은 ‘무역입국(立國) 정책’을 통해 우리 국민이 흘린 땀과 피였다. 무역 의존도가 높은 ‘소규모 개방경제’라는 한국의 위치는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어느 나라든 정치인들은 표(票)에 약하다. 특히 ‘조직화된 소수와 이해집단’의 입김에 민감하다. ‘인적자본’에 관한 분석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경제학자 게리 베커는 “영리한 정치인은 ‘왼손잡이 유권자’ 편에 선다”고 분석했다. 정치인의 속성상 침묵하는 다수 유권자보다 규모가 작고 조직화된 집단일수록 신경 쓰고 정치적 혜택이 돌아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야 한다.
오늘 국회는 한-칠레 FTA 비준동의안을 다시 처리한다. 만약 이번에도 총선을 의식한 일부 ‘농촌당’ 의원의 반대와 다수 의원의 방관 속에서 비준에 실패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암담하다. 여야 의원들은 국익과 사익(私益)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역사는 오늘 ‘여의도의 풍경’을 기록할 것이다. 그리고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권순활 경제부 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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