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깬 FTA 표결 방식=이날 찬반 토론에서 농촌 출신 의원 14명이 릴레이로 FTA의 부당성을 역설한 것이 ‘부결 가능성’ 조짐의 출발이었다.
찬반 토론이 끝나자 표결 방식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표결’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무기명 표결을 하자’는 안은 재석 210명에 ‘찬성 89, 반대 116, 기권 5’로 부결됐다. 이 결과는 평소 FTA 비준안의 민감성을 감안해 비밀투표 방식을 선호해 온 박관용(朴寬用) 의장과 한나라당, 열린우리당 지도부를 당혹스럽게 했다.
박 의장은 “무기명 표결이 부결됐으니, 곧바로 전자투표를 하자”는 일부 농촌지역 출신 의원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기명 표결을 하자’는 안을 다시 표결에 부쳤다. 이 안은 재석 218명에 ‘찬성 125, 반대 83, 기권 10’으로 가결됐다.
이때부터 ‘기명투표’에 대한 용어 해석을 놓고 단상의 박 의장과 단하의 농촌 출신 의원들간에 일대 설전이 벌어졌다.
박 의장은 “기명 투표란 의원 이름이 적힌 투표용지를 가지고 투표함에 가서 투표하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증거물로 남기는 방법이다”고 설명했다. 이에 ‘기명투표=전자투표’라고 인식하고 있던 이른바 농촌당 의원들 10여명이 단상으로 몰려가 “곧바로 구체적 찬반 결과를 알 수 있는 전자투표를 하면 되지, 무슨 소리냐”고 항의했다.
일부 의원이 “의장이 FTA 비준안을 가결시키려고 ‘장난’치는 것이냐”며 노골적인 불만을 쏟아내자 박 의장은 “그런 발언은 용납할 수 없다. 여러분이 단상에서 안 물러나면 내가 나가겠다”고 맞받았다. 이에 농촌당 의원들은 “그러면 의장이 나가”라고 맞고함을 쳤다.
오후 9시12분 박 의장은 “국회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전문가들과 논의하겠다”며 일단 정회를 선포했다. 국회 관계자들은 “의원들이 전자투표를 원했다면 ‘무기명투표 안’뿐만 아니라, ‘기명투표 안’까지 부결시켰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지금 투표하면 부결된다”=오후 9시15분경부터 박 의장은 의장실에서 4당 원내총무와 긴급 회동을 가졌다. 한나라당 홍사덕(洪思德) 원내총무 등은 “지금 공개투표 방식으로 표결하면, FTA 비준안이 부결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토로했다. 이에 박 의장은 오후 10시경 고건(高建) 국무총리와 김진표(金振杓) 경제부총리를 불러 “정부 차원의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의장은 동시에 의장실 밖으로는 “농촌 출신 의원들의 사과가 없는 한 사회를 보지 않겠다”는 ‘연막탄’을 피우기도 했다.
한나라당 이규택(李揆澤), 민주당 이정일(李正一) 의원 등 ‘농촌당’ 의원 7명도 이 자리에 배석했다.
이때부터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소속 의원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 오늘 표결 못 한다”며 귀가를 종용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후 10시43분 박 의장은 본회의장으로 가 “기명투표에 대해 사전에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것은 내 불찰”이라고 ‘사과’한 뒤 산회를 선포했다.
한편 이날 일시 귀국한 신장범(愼長範) 주칠레 대사는 “칠레 정부에 뭐라 설명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한숨을 지었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이명건기자 gun43@donga.com
이승헌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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